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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김정남의 유창한 다국어

입력
2007.11.2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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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나타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36)의 모습이 일본 후지TV카메라에 잡혀 국내 방송에도 보도됐다.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일본 언론들에 의해 중국과 유럽 지역에 출몰하는 모습이 종종 보도된 터라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유창한 불어 구사는 단연 화제가 됐다.

치통 때문인 듯 볼이 부은 채로 "치과 치료를 받으러 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을 잘 할 수 없는 형편이다"라고 불어로 말하는 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 그는 혼자였고, '당신이 북한의 차기 지도자인가'라는 질문만 빼고 스스럼없이 질문에 답변했다.

2월에 중국 베이징에서는 영어질문에 영어로 답했다. 간단한 회화수준을 넘는 실력이었다. 일본 기자가 '니혼고오 와카리마스카'(일본어를 할 줄 아느냐) 하고 물었을 때는 '와카리마센'(못한다)이라고 답했다. 못한다고는 했지만 웬만큼 일어를 알아듣고 간단한 답변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파리에선 불어, 중국에선 영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부인 성혜림씨 소생인 그는 아홉살 때인 1980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로 유학 보내졌고 거기서 국제종합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어는 그때 익힌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그가 한국말로 질문을 받으면 평양 말투가 아니라 흠잡을 데 없는 서울말씨로 답변한다는 사실이다. 서울말을 체계적으로 배웠거나 남한 방송 등을 자주 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외국어 능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난 여름부터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재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5월 도미니카공화국의 가짜 여권으로 가족과 함께 일본 나리타 공항을 통해 입국하려다 적발돼 망신을 산 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후계구도에서 탈락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그래서 평양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베이징과 마카오, 러시아, 오스트리아, 파리 등지를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8월 말 평양으로 복귀해 요직을 맡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그 직책이 소문대로 당 군 정을 통제하는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중책이라면 후계구도 경쟁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김 위원장도 그 자리에서 후계구도를 굳힌 바 있다. 김정남을 내모는 데 실질적 역할을 했다는 김 위원장의 두 번째 부인 고영희씨가 2004년 사망한 것도 변화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일부에서는 고영희씨의 소생인 김정철을 후계로 밀었던 인사들이 2004년 경 핵심요직에서 밀려난 것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권력의 장막 뒤에서 펼쳐지는 암투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최근 6자회담 진전과 궤를 같이하는 북한의 변화 조짐이 김정남 후계 가능성을 한층 높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개혁개방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지만, 북한에는 개혁개방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실제로 북한은 최근 대외관계에 매우 적극적이다.

흐름이 그렇다면 후계구도에서는 외부세계 경험이 풍부한 김정남에게 경쟁력이 있다. 외국어 구사능력이나 상황대응 능력을 보면 먹고 놀기만 한 '오렌지'는 아닌 게 분명하다.

대원군이 한때 반대세력의 눈을 속이기 위해 파락호처럼 행동했던 것처럼 그도 일부러 망가진 모습을 보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김 위원장이 장남에게 기대와 배려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흔적도 있다.

● 김정일 후계자로 유력해진 듯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가 대량 살상무기(WMD)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국제사회 복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런던에서 공부한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이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김정남이 북한에서 그런 역할을 해 준다면 김 위원장도 후계체제의 불안 없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북한에서 3대세습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는 견해도 많지만 김정남의 동선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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