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볼거리를 만들어온 극작ㆍ연출가 오태석씨는 무대에 한복 의상이 필요할 때면 손수 만든 종이 한복을 쓴다. 시중의 한복이 보기 좋은 기생 옷처럼 괜히 하늘하늘 거리기만 해 힘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고유 문화의 힘과 결을 표현하는 데 닥종이를 두드려 만든 한지 이상 가는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씨의 지론을 확인하듯 종이연구가 김 경(83)씨가 단행본 <종이 박물관> 으로 한지의 매력을 마음껏 펼쳐 놓았다. 종이>
“등나무로 엮은 바구니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검은 옻을 입힌 항아리인가 나무 깎은 그릇인가, 도대체 저 물건이 무엇인가, 나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만든 지 300년은 족히 돼 그의 소장품 중 최고(最古)의 반열에 드는 종이요강을 김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스물 한 살 시절의 김씨는 좁다란 가마 안에서 시달리며 먼 길을 가야 하는 새색시의 요의를 달래줄 그 기발한 물건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놓아본 적 없는 김씨의 한지 사랑이 시작됐다. 종이 세수대야, 제주 해녀에게서 구한 종이 신발, 인사동을 뒤져 찾은 종이 생활용품 등 잊혀진 과거를 찾아 나서는 순례의 행로였다. 인사동의 골동품상은 그를 ‘종이 골동품을 찾아 헤매는 괴상한 여자’로 기억할 정도다. 시골에서 골동품을 들고 와 기웃거리는 중늙은이와 그는 10년 지기였다.
종이 꽃, 종이 거북, 종이 배, 종이 용, 종이 호랑이 등 종이로 만든 생활용품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중 종이로 만든 세간 특히 여성 용품에 더욱 애정을 품고 전국을 헤맸다. 그래서 지금 애장하는 종이 유물이 130여 점. 그것을 모으며 우리 종이를 주제로 연구를 했다. 신라 최고의 종이인 잠견지와 옥춘지를 복원한 데 이어 고려지까지 되살렸다.
1977년 종이연구회 한매재를 세워 교육과 전시에 주력하던 김씨는 86년 공간갤러리 전시를 계기로 세상과 낯을 텄다. 서울올림픽 후 일본 도쿄 후지미술관에서 <한국 종이 유물전> 을 연 것을 신호로, 95년 프랑스 파리의 <종이 의상 초대전> , 96년 독일 베를린의 <종이예술전> 등 10여 차례의 개인ㆍ그룹전을 통해 한국 종이 예술의 우수성을 알렸다. 종이예술전> 종이> 한국>
지금 김씨는 노환에 불편한 거동보다, 우리 귀한 것이 곡해되는 현실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한지를 짚처럼 길게 엮어 새끼 꼬아 놓은 것을 노엮개라 해요. 이렇게 순 우리말을 두고도 일본식 표현인 지승(紙繩)을 쓰는데 참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책에서 사진작가 김중만 씨의 정교한 사진이 종이 예술품들의 결을 살린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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