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대기획의 아홉번째 ‘노사관계 개혁’ 토론에서 이용득 한국노총,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사정 대타협이 이루어지려면 지금처럼 정부가 주도하는 방식이 아닌 노사정이 처음부터 머리를 맞대는 대등한 파트너십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대타협을 이룬 아일랜드는 노사정 공동체사회인 반면 우리는 여전히 정부와 자본이 정책을 주도하는 노동배제사회”라고 진단하고 “이제 노사관계 개혁을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며 노사발전재단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부가 노사로부터 걷는 5조원에 달하는 고용보험, 산재보험료 중 일부를 지원하면 노사발전재단이 직업훈련, 실업자 지원 등을 정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위원장은 특히 “실업은 일자리의 미스매칭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면서 “산업단지가 있는 광양 구미 창원 안산 등에 지역 거버넌스(노사 협치체제)를 만들어 일자리 매칭을 해주면 작게는 고용문제 해결, 크게는 노사 대타협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석행 위원장은 “정부가 안을 만들어놓고, 또 정부와 자본이 교감한 상태에서 노조에게 따라오라는 식으로는 노사정 대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노조, 사용자, 정부가 각각 대등한 지분으로 노사정위를 구성, 시안을 만드는 것부터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우리 기업들의 해외진출은 노사관계의 불안이나 임금 때문이 아니라 외국의 부지 무상지원 등 조건이 좋기 때문”이라며 “제조업 공동화 문제는 산업정책으로 풀어야 하며 그 정책입안에도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노사발전재단을 통한 지역 거버넌스 구축에 대해 “개인적으로 찬성하지만 민주노총 내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사정의 대등한 파트너십 설정에는 양대 노총위원장이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노동운동 위기의 극복방안, 노조의 해외기업 유치 협조, 노조의 정치세력화 등에 있어서는 큰 인식차이를 보였다. 특히 노동운동의 위기극복에 대해 이용득 위원장은 자기반성과 변화를 제시했으나 이석행 위원장은 내부 응집력과 조직력의 복원에 무게를 두는 편차를 보였다.
이영성 기자 leeys@hk.co.kr
■ 이용득 vs 이석행
시대정신 대기획 '노사관계 개혁' 토론을 마친 뒤 이석행 위원장은 이용득 위원장에게 "형님, 소주 한 잔 하며 얘기를 해야 하는데 제사가 있어서 오늘은 어렵겠다"고 말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참 아쉽다"고 했다. 사석에서는 이처럼 형과 동생이었지만 토론에서는 양대 노총의 수장답게 단단한 논리로 치열하게 부딪혔다. 볼만한 논전이었다.
_노동운동이 1980년대 민주화를 이끌며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요즘 국민의 시선은 차갑습니다.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졌다고 보십니까.
이용득 위원장= 노동운동이 위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이든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우선 변해야 하는데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변화 의지도, 책임지고 반성하는 자세도 없습니다. 1987년부터 20년간을 보면, 전반기 10년은 노동운동에 대해 평가가 좋았습니다. 그 때 국민적 목표는 정치 민주화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느 시점을 고비로 노동운동은 내리막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못한 것이 대중성 상실로 이어지고 노조 조직률이 10%대로 하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사용자는 더 합니다. 노동운동이 87년 운동기조에 머물러 있다면, 사용자는 70~80년대 낡은 경영철학과 노무관리 방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석행 위원장= 노동운동이 단지 파업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국민지지를 잃고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노조 조직률은 7%대로 우리보다 더 낮지만 파업을 자주 합니다. 최근 국민연금 문제로 파업이 있었고 3년 전에는 비정규직 문제로 300만명이 파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 다수가 지지를 보냈습니다.
파업 때문에 노동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짜 위기는 내부의 단결력과 응집력이 떨어진 데 있습니다. 이 문제만 회복하면 노동운동은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노동운동의 조직력도 더 확대, 강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_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을 따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들은 '대우가 좋은 현대차 근로자들이 회사의 국제경쟁력은 외면한 채 너무 많은 것을 얻어낸다'고 비판합니다.
이용득 위원장= 중요한 것은 조직력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프랑스와 차이가 있죠. 프랑스 노조는 대표성이 있으니까 조직률이 10%가 안 돼도 전체 노동자를 대변합니다. 유럽의 노조들은 일자리, 인적자원 개발, 실업자 직업훈련 등에 대해 사용자들과 논의하고 실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기들 문제에만 빠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곱지않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현대차입니다. 현대차는 노사가 고민을 나누는 구조가 없습니다. 한쪽은 늘 투쟁만 하고, 한 쪽은 비용 개념으로 보고 상대를 압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용자가 직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용자의 경영철학이나 비전이 없기 때문이죠. 이러다 보니 노조는 당장의 노동조건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매년 투쟁을 해도 노사 모두 손실을 보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현대차 사용자는 노조의 투쟁에 백전백패 했고, 노조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사측의 손실은 현대차 하청업체에 전가됩니다. 부품의 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거죠. '우리는 살 테니 너희는 죽어라'식의 낡아빠진 경영철학입니다. 이럴 바에야 오너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현대차를 '내 회사'로 여기게 될 겁니다.
이석행 위원장= 현대차 노조 투쟁사를 복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차는 90년대 중반 민주노총 초창기에 노동운동의 중심이 돼서 싸웠습니다. 당시에 현대차 노조는 임금 인상이 아니라 정리해고 반대 등 제도와 가치를 위해 투쟁했죠.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10회 이상 파업을 했습니다. 모두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로드맵), 비정규직 문제 등을 놓고 싸웠습니다. 올해도 한 차례 파업을 했는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반대하기 위해서였죠. 일부 보수 언론에서 비난하듯 현대차 노조가 임금 인상만을 갖고 싸우는 이기적인 조직은 아닙니다.
_불안정한 현대차의 노사관계가 기업경쟁력 약화를 넘어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석행 위원장= 그런 우려보다는, 자동차 산업이 노조가 강성이라는 이유로 글로벌화를 착착 진행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5년 동안 자동차 산업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동차 산업의 위기가 노조의 임금 인상 때문인가'에 대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보다 일본 자동차 산업 근로자의 임금이 더 많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진짜 위기는 무분별한 해외 진출입니다. 미국에 자동차 공장을 짓는 건 인건비가 싸서가 아니라 부지를 枰Ⅷ?주는 등 토지ㆍ물류비가 적게 들어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인도 등에 공장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동차 공장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불안한 노사관계 때문이 아니라 산업정책 때문입니다. 제조업 공동화 문제를 노사관계의 불안 때문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용득 위원장= 현대차가 지금 같은 노사관계로는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없습니다. 현대차 하청업체들은 매년 현대차로부터 3~4%의 단가 인하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청업체들은 기술개발은커녕 기업을 유지하기도 힘듭니다. 일본의 부품산업이 강한 이유는 원청회사가 하청업체의 기술개발에 자금을 대주거나 금융기관에 지급보증을 해주는 식으로 적극 지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차는 하청업체에 손톱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니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_국가부도 위기에까지 갔던 아일랜드는 80년대 말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국민소득 4만달러의 선진국으로 올라섰습니다. 우리는 왜 노사정 대타협이 안 되는 것인가요.
이석행 위원장=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하겠다' '소통하겠다'고 해놓고 '따라 와라'정부가 됐습니다. 비정규직 보호법만 해도 백지상태에서 노조와 사용자가 같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안을 만들어놓고 노사에게 동의 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와 자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조는 1대2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올 초에 민노총 위원장이 되면서 재벌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다고 했지만 전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노사정 대타협은 정부와 자본이 요구하는 대로 노동자가 따라가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용득 위원장=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부 주도로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민간 주도로 사회 개혁을 하는 게 인정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아일랜드 등은 노사정 공동체사회인 반면, 한국은 노동배제 사회입니다.
물론 노동계도 문제가 있습니다. '노동계가 파트너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웠나' 하는 자기 반성이 필요합니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되면서 '이제 칼은 칼집에 넣겠다'며 '노사가 함께 호미와 괭이를 들고 논밭을 경작해 보자'고 했습니다. 분배 투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진사회를 위한 노사의 역할을 찾아보자고 제안한 것이죠. 재계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만든 것이 노사발전재단입니다. 인적자원개발, 복지정책, 직업훈련, 실업문제 등을 정부가 아닌 민간인 노사가 다뤄보자는 취지입니다. 정부는 고용보험료 등 매년 5조원 정도를 노사로부터 걷어서 복지정책, 직업훈련, 실업자 지원 등에 쓰고 있지만 효율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노사 중심의 민간부분에 정부 사업을 떼어주면, 노사가 자연스럽게 자주 모여 스킨십을 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노사가 파트너십, 즉 동반자 의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아일랜드 사례가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사가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안 들어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아일랜드와는 그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_그런 구체적 사례가 있습니까.
이용득 위원장= 있습니다. 광양 구미 창원 안산 등 일자리가 많은 지역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 지역 거버넌스(노사정 협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주도해 지역 거버넌스를 만든다고 하면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지역의 노사가 주체가 되고 학계 시민단체 등이 모여 거버넌스를 만든 뒤, 이 곳에서 직업훈련을 실시하고 고용 문제를 논의해야 합니다. 실업은 일자리의 미스매칭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쪽은 구인난을 겪는데 다른 한 쪽은 구직난을 겪는 것입니다. 미스매칭은 시장 개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데, 이는 정부보다 민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잘 할 수 있습니다.
노사발전재단이 이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데, 정부는 '너희가 일단 알아서 해봐라, 잘 되면 그 때 돈과 사업을 맡기겠다'는 입장입니다. 기업과 노동자가 매년 고용보험료 등으로 5조원을 내고 이 중 1조원이 매년 남는데, 이 돈을 노사에게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줍니다.
이석행 위원장= 대화나 대타협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 내려면, 주체들끼리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노사정위는 정부가 안을 내놓으면 노사가 의견을 내는 정도밖에 안됩니다. 대타협이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노사정이 각자 몫을 갖고 전문위원, 직원을 뽑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노사정위는 관료조직이 지배하고 있고 관료와 자본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노동계는 생떼나 쓰는 정도로 인식돼서 조금 끼워주는 식으로 노사정위가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_비정규직 문제가 노동계의 최대 현안입니다. 비정규직을 전?정규직으로 전환하기는 불가능한데 해법은 무엇일까요.
이석행 위원장= 실업급여제도를 개선하면 비정규직 문제도 어느 정도 풀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생계 걱정 없이 재취업을 준비하기엔 실업급여 액수가 너무 적고 지급 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동시장을 떠났을 때 생계를 이어가며 재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이 촘촘해야 합니다. 사회안전망만 잘 갖춰진다면 비정규직 문제도 그리 심각한 현안이 안 될 것입니다.
이용득 위원장= 세상에 완벽한 법은 없습니다. 비정규직법 이전에 경영자들은 경영철학을
이석행 위원장= 생각이 다릅니다. 비정규직법의 취지는 비정규직이 더 늘어나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민주노총이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시행된 비정규직법에서 사용사유 제한이 없어지면서 기업은 비정규직을 2년에 한해 맘껏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차별시정 신청권을 비정규직 본인에게만 하도록 하고 노조에 주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은행권의 정규직화, 무기계약직 전환만 보면 비정규직법이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부처나 지자체에서 비정규직법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법은 외주화 등의 편법에 전혀 대비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취약한 직장의 비정규직에겐 나락으로 몰아가는 악법입니다.
이용득 위원장= 차별시정 신청권을 노조에게도 주고, 비정규직 사용사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노총과 같습니다. 다만 한꺼번에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1단계로 입법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 문제에서는 앞으로는 민주노총과 함께 할 것입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영세사업자들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돼야 합니다.
_지난해 쟁점이었던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3년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정부에서 다시 논의될 전망인데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이석행 위원장= 일정 기간 유예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유예할 때마다 노동계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3년 유예를 하면서 노동계는 부당해고를 한 사용자의 형사처벌 조항을 잃었고, 파업 등 쟁의권이 제한되는 필수공익사업장이 확대되는 손실을 봤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줄게 없습니다.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을 정부가 금지하면 안 됩니다. 과도한 법 규제입니다.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합니다. 복수노조는 전면적으로 허용해야 하구요. 그것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입니다.
이용득 위원장= 복수노조는 3년 유예한 뒤 다시 논의하기로 한 게 아니라 시행되는 것입니다. 복수노조와 사측의 교섭 창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외국은 노조가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기 위한 기금 조성기간이 충분했지만, 우리는 노사가 이런 기금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부당노동행위로 돼 있습니다. 재정이 열악한 노조 혼자 기금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_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입니다. 이용득 위원장은 고용 증대를 위해 정부의 해외투자설명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외자유치에 나섰습니다. 민노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석행 위원장= 노조가 국가산업정책의 입안 단계부터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외 자본을 갖고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폐해가 있을까도 생각해야 합니다. 경남 사천에 배를 만드는 큰 조선 공장이 있습니다. 경영진에 물었더니 시에서 부지를 만들어 놓고, 20년간 평당 5,000원씩 장기 임대해줬기 때문에 공장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지자체의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선뜻 내륙에 조선 공장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기업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노사관계 불안이나 인건비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가 공장부지의 무상지원 등 우대책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용득 위원장= 정부의 해외 투자설명회에 계속 다녔는데, 처음에는 노조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고속철 떼제베(TGV)를 해외로 수출하려 할 때 대통령이 노총위원장과 함께 협력한다고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도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서 나아가야 합니다.
건전한 산업자본이 우리의 노동운동 때문에 한국에 오지 못한다면 당사자인 노조가 가서 우려를 불식시켜줘야 합니다. 물론 투기 자본은 안 됩니다. 일본에 투자 설명회를 갔을 때 그 쪽에서 '앞으로 6,7년은 계속 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확신은 안 서니 계속 지켜봐야겠다는 뜻이겠죠. 앞으로도 계속 참여할 겁니다.
_노동계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지 10년 여가 지났지만 국민 지지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 약합니다.
이용득 위원장= 노동단체가 정당을 만들어 성공한 경우는 영국 폴란드 브라질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실패했죠. 성공한 세 나라의 공통점은 당시 연간 국민소득이 2,000달러정도 였습니다. 노동단체의 정치 참여가 성공하려면 소득 수준이 낮고 노동자들이 큰 변화를 갈망할 때 가능합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인 지금 그런 성공은 힘들다고 봅니다.
이석행 위원장=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친(親) 쥐적인 고양이라도 배고프면 쥐를 잡아먹습니다. 친 노동자적이라는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850만 비정규직이 2만달러 시대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재야활동이나 학생운동에 몸 담았던 많은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갔지만, 과거의 철학과 신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나가야 합니다.
_한국노총은 조합원 투표를 통해 정책연대 후보를 결정하기로 했고 민주노총은 민노당과의 연대를 선언했습니다. 서로의 전략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용득 위원장=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주체가 되는 길이 정치정당을 만들어 집권하는 것밖에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기존 정당과의 정책연대가 필요한 셈이죠. 한국노총은 조합원의 총의를 물어 정책연대 후보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조합원들이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친화적인 인물 대신 다른 후보를 뽑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안목이 키워지면, 그 때는 영구 정책연대를 할 계획입니다.
이석행 위원장= 집권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정체성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명박 후보는 '강성 노조를 없애겠다'고 하고 '교수가 무슨 노동자냐'고 했습니다. 한나라당이 40% 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지만, 결코 노동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 기준도 그 수준에 맞춰지게 됩니다. 정책연대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신당이나 다를 게 뭐 있습니까. 구속노동자 수를 보더라도 참여정부 들어서 가장 많이 양산됐습니다. 더디더라도 민주노동당을 통해 우리의 이상을 실현해 나갈 겁니다.
이용득 위원장= 민주노총이 민노당을 만들었듯 한국노총이 별도 정당을 만드는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_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주시지요.
이용득 위원장= 현실에만 갇혀 있으면 새로운 방향이 안 보입니다. 선진국의 노동운동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는 '해주는 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약자'라는 나약한 생각을 스스로 버려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인에 걸맞은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석행 위원장= 노동운동이 질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프랑스 노조들의 파업에 국민 지지가 왜 높을까요. 그들만의 이익이 아닌 국민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 투쟁했기 때문입니다. 국회가 국민연금을 깎았을 때 우리가 왜 가만 있었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사회 현안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건전한 투쟁을 할 때 노동운동도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87년 이후에 세계적으로 우리만큼 투쟁한 노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노동자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열악한 사회보장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실천 가능한 대안을 내놓고 국민과 함께 투쟁하면서 정치세력화하는 노동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회= 이영성 부국장 정리=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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