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아직 계산기 혹은 타자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모뎀을 통해 전화선과 연결되면서 그것은 완전히 다른 매체가 된다. 고립된 컴퓨터는 고독한 문자문화의 도구이지만, 서로 연결된 컴퓨터들은 강요된 침묵을 깨고 매우 수다스런 구술문화의 도구가 된다.
프로세서의 속도가 빨라지고 메모리 용량이 늘어나면서 컴퓨터는 이제 소리와 영상까지 전송하게 된다. 이로써 컴퓨터는 구술매체의 특성에 더해 영상매체의 특성까지 갖게 된다. 오늘날 인터넷 용량의 대부분은 아마도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라, 소리를 동반한 동영상을 전송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컴퓨터가 새롭게 획득한 이 특징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앞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오늘날 컴퓨터는 구술매체이자 동시에 영상매체다. 이 두 가지 특성을 합치면, 예를 들어 유저들이 서로 대화하며 함께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네트아트’라는 것이 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티즌들이 함께 만드는 예술을 말한다. 미국의 인터넷 아티스트 빅토리아 베스나는 1995년에 온라인 유저들과 함께 조각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녀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유저는 3D 인체모형을 구축하고, 변형하고, 렌더링 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다.
프로젝트의 동기는 단순했다. 사람들에게 “어떤 신체를 갖고 싶은지” 설문을 돌렸더니, 호응이 적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수천 명이 응답을 해왔다는 것이다. 제 신체를 리모델링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강렬한 열망. 이를 읽고 그녀는 대중들로 하여금 사이버 공간에 다른 자아(alter ego)를 디자인할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가 인터넷을 “궁극적인 민주주의적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고 자평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유저의 화신이 되는 것을 흔히 ‘아바타’라고 부른다. 그저 이미 완성된 아바타의 목록 중에서 수동적으로 고를 게 아니라, 사이버공간에서 자기가 입을 신체를 스스로 디자인해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네티즌들이 함께 가꾸는 정원도 있다. 버클리 대학의 켄 골드버그의 <텔레가든> (1995)은 유저들의 도움으로 가꿔나가는 원격 정원이다. 베란다의 화분들처럼 저 조그만 정원의 식물들은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에 접속한 유저들은 캠 카메라로 정원을 지켜보며, 식물들을 함께 보살피게 된다. 텔레가든>
작품에는 로봇 팔이 달려 있다. 유저들은 자신의 PC로 이 팔을 원격 조정하여 살아있는 식물에 빛을 쬐고, 물을 주게 된다. 새로 씨를 뿌리는 것도 가능하다. 1995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놀랍게도 2004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정원의 식물들이 거의 10년 간 네티즌들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이어로 유지되는 에덴동산. 이는 하나의 예술적 실험에 불과하지만, 이 시스템의 실용적 사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게다. 가령 관심을 가지고 보호해야 할 생태계가 있다고 하자. 생태주의에 관심을 가진 네티즌들이 힘을 합쳐 환경의 파괴를 감시하고, 필요할 경우 원격으로 개입하여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자. 컴퓨터로 별 밭에 함께 별자리를 그릴 수도 있다. 알렉산더 갤러웨이가 만든 <별이 빛나는 밤> (1999).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우주와 같기도 하고, 같은 제목을 가진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기에 “starry, starry night.."으로 시작하는 돈 맥클린의 노래를 곁들이면 제격일 것이다. 별이>
밤하늘의 성좌도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실은 그 자체가 네트 아트이자, 동시에 ‘리좀’이라는 웹 사이트 자료실의 인터페이스다. 하늘에 빛나는 저 별들 중에 하나를 ‘클릭’ 하면, 자료실에 저장된 문서 중의 하나로 들어가게 된다. 사용자가 많이 찾는 문서일수록 별의 밝기 등급은 더 올라간다.
대개 사용자는 하나의 문서를 읽은 다음에는 그와 연관된 다른 문서들로 이동하기 마련이. 이때, 별들 사이에 선이 생기면서 저절로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한 마디로 데이터베이스 이용현황을 별자리 모양의 그래픽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홈페이지나 웹 사이트의 인터페이스를 직관적으로 디자인하는 데에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밤하늘에 조각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에 로보틱스와 서치라이트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2000년, 그러니까 새 천년이 시작되는 그날 멕시코시티의 상공은 거대한 전시장이 되었다.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로봇 팔로 18개의 서치라이트로 네티즌들이 도시의 상공에 빛의 조각을 만들어 띄운 것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2주일 동안 전 세계 89개 나라에서 무려 80여 만 명이 이 사이트를 방문하여 빛으로 조각을 빚는 데에 참여했다고 한다. 빛으로 만든 이 조형물은 반경 10마일 이내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써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를 포괄하는 거대한 공공예술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새해를 맞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게다. 변함없이 보신각 타종만 반복할 게 아니라, 현장에 나가지 못한 모든 시민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네트아트의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것이다. 해마다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꾸면,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새해를 시민들은 ‘올해는 무얼까’ 하는 기대와 함께 맞을 수 있을 게다.
한국처럼 온 나라의 구석구석에 네트워크가 깔린 곳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인터넷 인프라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의 사용이다. 그 발달한 네트워크가 한국에서는 그저 영상을 소비하는 오락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의 발달한 네트워크는 이제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는 창조적 수단으로 바뀌어야 한다.
■ 네트는 진화했는가? 창의성은 실종… 반동성은 난무… '질적 뒷걸음'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보자. 90년대에 PC들이 모뎀과 연결되면서 이른바 PC통신이 시작된다. 독백은 이제 대화가 된다. 하지만 이 시대의 대화는 여전히 문어체 텍스트를 교환하는 이성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더불어 대화 자체가 짧은 구어체 문장을 주고받는, 다분히 감정적인 대거리로 변해 간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인터넷은 본격적으로 영상의 시대로 접어든다. DC 인사이드의 '?자' 문화는, 이 이행과정에서 발생했다. '?자'들의 묵언 수행은 컴퓨터 문화에서 말의 사라짐을 상징한다. 이 디지털 선승들이 행하던 '불립문자'의 실천은 물론 그들이 보유한 '디카'라는 무기와 관련이 있을 게다.
초기의 통신문화는 꽤 수준이 높았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에서는 수준 높은 논객들의 치열한 게시판 논쟁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인터넷의 정보가 영상으로 바뀌어가던 초기에도 어느 정도 수준이 유지됐다. 그때 나돌던 영상 패러디 중에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예술적으로 볼만 한 게 꽤 많았다. 지금은 어떤가?
공들여 쓴 문어체의 텍스트들은 사라지고, 몇 마디 감정 섞인 구어체 문장으로 된 쪽글만 난무한다.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던 기발한 영상의 패러디들은 사라지고, 반동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선동적 영상물, 아니면 TV나 광고 영상을 조잡하게 편집한 보수적 UCC들이 대부분이다.
2002년 대선에서 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인터넷'의 진보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그 혁명의 후예들은 지금 네트워크를 매우 반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대편도 다르지 않다. 운하 파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청동기 프로젝트다. 도덕성 같은 게 필요 없다는 발상 역시 도덕이 수립되기 이전의 영웅시대 문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창의성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눈은 과거에 사로잡히게 된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다리는 움직일수록 뒷걸음만 칠뿐이다. 발달한 네트워크도 창의성이 없으면 이렇게 쉽게 자본과 권력에 포섭되고 만다. 이 반동성을 벗으려면 네트워크에 다시 창의성의 동력을 실어야 한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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