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이룬 성과라 더더욱 기쁩니다. 정년퇴임 전 마지막 강의가 있는 날인데, 감회가 새롭고 뿌듯하네요.”
570년 만에 자격루를 원형 복원한 주인공인 남문현(65)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21일 자격루를 최초 공개하는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에 한복차림으로 나타났다. 상서로운 행사가 있는 날이면 늘 입는 옷차림이다.
그는 “바이오 엔지니어로서 조선 최초의 친환경 자동제어 시스템인 자격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오랜 기간 자료만 뒤적이던 그가 본격적으로 복원작업에 발을 들인 건 1994년 과학기술처의 특별연구사업으로 자격루를 부분부분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97년 문화재청의 연구 용역이 발주되면서 복원팀을 이끌게 된 그는 도편수, 방짜유기장 등 각 분야 전문가들 32명으로 팀을 꾸려 10년간의 복원작업을 지휘했다.
그러나 실록의 구절들만을 토대로 570년 전 자격루를 실재로 구현해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종 때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현재 물항아리 2점(국보 제229호)만 남아있는 덕수궁의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년) 자격장 박세룡이 창경궁 보루각(報漏閣)에 개량, 설치했던 것을 옮겨온 것. 전체를 가늠할 실물 모델이 없었던 것이다.
“중종 때 창경궁에 설치된 자격루는 1865년 경복궁 중건 이후 경복궁으로 옮겨져 1895년까지 표준시계로 사용되다 버려졌습니다. 당시 전차가 도입되면서 10시에 울리는 막차 벨이 자격루를 대체했던 거지요.”
세종실록 65권의 1~3쪽 ‘보루각기’에 근거해 복원된 자격루는 왼편의 물시계와 오른편의 자격장치 등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왼편에 놓인 크기별 항아리(파수호ㆍ播水壺) 세 개가 중앙부의 원통형 항아리(수수호ㆍ受水壺)로 일정하게 물을 흘려보내면 그 안에 있던 잣대(방목ㆍ方木)가 상승하면서 항아리 벽에 놓인 구슬을 건드린다. 그러면 구슬은 오른편 시보장치의 상자로 굴러들어가 상자 내부를 움직이면서 시보인형들이 종과 징, 북을 치게 만든다.
종은 12간지에 따라 두 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 12회 울리며, 각 시간마다 해당 간지에 해당하는 인형이 시보장치에서 튀어나오도록 설계됐다.
북과 징은 오후 7시(1경)부터 오전 3시(5경)까지를 5번으로 나눈 경과, 1경을 다시 5번으로 나눈 점으로 구성되는 경점법에 따라 1경에 북 1회, 1점에 징 1회가 울린다. 자격루의 종과 징, 북소리가 운종가의 종루(鐘樓)에 전해지면 종루에선 통금시간인 인정에 28회, 해금시간인 파루에 33회 대종을 울려 성문을 닫고 열었다.
세종실록에는 자격루를 만든 이유에 대해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함을 염려하여…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을 스스로 알림으로써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교문화권에서 천체를 관찰해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권리였기에, 시간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관리는 큰 벌에 처해졌다. 남 교수는 “자격루는 경천애민 사상이 배어있는 첨단 과학기기”라며 “해시계나 별시계가 낮과 밤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물시계는 표준시계로서 남다른 의의를 갖는다”고 말했다.
일본인 학자들이 물항아리 2개를 이전하면서 2단방식으로 잘못 배열한 덕수궁의 자격루와 달리 3개의 항아리를 1열3단으로 바로잡은 것도 큰 의의다.
“자격루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동아시아 전통의 유입식 물시계와 크고 작은 구슬을 이용한 아라비아식의 자격장치를 조합한 우리만의 독창성이 살아있는 발명품이죠. 남의 물건을 우리식으로 세계화한 매우 훌륭한 예입니다.”
복원된 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전면 개관하는 28일 이후 일반 관람이 가능하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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