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숱한 의혹과 사악한 비방이 흔히 등장한다. 지상 최대의 쇼로 불릴 정도로 거창하고 화려한 선거전이지만, 서커스 천막 주변이 늘 그렇듯이 갖가지 뒷거래와 비리 주장이 난무하고 욕설과 멱살잡이가 벌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소란은 대개 무대 위 후보들이 쏟아내는 구호와 웅변에 가려지고 관객의 환호에 묻히기 마련이다. 숱한 제도적 결함과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미국 대선이 ‘민주주의 축제’라는 찬사와 자부심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바탕일 것이다.
■19세기 미 대선에서는 경쟁 후보를 술주정뱅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헐뜯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노름꾼 소매치기 색정광 매독환자 살인마라고 매도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무신론자 무정부주의자 반역자 등, 당시에는 훨씬 치명적인 비방도 동원됐다. 때문에 1800년 대선에서 토머스 제퍼슨과 겨룬 현직 존 애덤스의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정신과 도덕심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개탄했다. 1884년 대선을 지켜본 영국의 역사학자 브라이스 경은 “선거 논쟁의 중심이 후보의 거짓말과 성생활 습관인 것에 놀랐다”고 점잖게 비꼬았다.
■이런 비방전이 소송은 물론이고 결투에 이른 적도 있다. 1824년 대선에 나섰던 헨리 클레이 하원의장은 일반투표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해 하원에 넘겨진 결선투표에서 물밑거래로 존 퀸시 애덤스의 당선을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자 의혹을 발설한 상원의원 존 랜돌프와 권총 결투 끝에 사과를 받았다. 첫발이 모두 빗나간 뒤 두 번째 사격에서 클레이의 총탄이 외투를 스치자 랜돌프는 허공에 총을 쏜 뒤 손을 내밀며 “외투 값은 물어내라”고 화해를 청했다. 클레이는 “빚이 적어 다행”이라며 손을 맞잡았고, 이 에피소드는 ‘명예로운 결투’로 기록됐다.
■우리 대선은 19세기 미국 수준보다는 낫다. 짧은 민주선거 역사에 비해 값진 경험을 쌓은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음모와 비방 술책이 개발도상 단계인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대선은 비방전의 치열함에서 크게 도약하는 기록을 남길 듯해서다. BBK 사건의 김경준씨가 송환되자 범여권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거짓말쟁이 사기꾼 범죄자 현행범 등으로 거칠게 욕하는 것에서 그런 조짐을 본다. 이해찬씨는 “종신형 감”이라고 비난하다 못해 아예 “달나라로 추방해야 한다”고 외쳤다. 21세기 총리까지 지낸 이라면 19세기 ‘명예로운 결투’가 일깨우는 도량과 절제는 지녀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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