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맥스 전찬웅(40) 대표를 보면 우공이산(遇公移山ㆍ 꾸준히 한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이라는 사자성어가 연상된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도 바람 잘 날 없기로 유명한 게임업계에 몸 담은 지 10여년.
그 동안 무수한 업체들이 IT 버블이 꺼지면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전 대표는 흔들리지 않고 회사를 지켰다. 모진 풍파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생존전략을 들여 다 본다.
전 대표가 게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캐나다 유학시절 일본의 게임업체 닌텐도가 현지 그래픽 업체와 손을 잡고 설립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스쿨에 입학하면서부터. 입학 때만 하더라도 ‘게임산업이 커질 것’이라는 막연함이 앞섰다. 하지만 2년 동안 게임을 알아 갈수록 묘한 매력에 빠졌다.
그는 졸업을 하자마자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투자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투자하겠다던 업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때마침 문화관광부가 실시한 제1회 우수국산게임 사전 제작지원 사업에 그의 게임 기획서가 당선이 됐다.
전 대표는 일단 부상으로 받은 1,000만원을 종자돈으로 게임 제작에 들어갔다. 정부지원을 받아 임대료가 저렴한 서울 교대 인근의 한국소프트웨어 진흥센터에 둥지를 틀었고, 6명의 제작자들도 영입했다.
의욕만 앞서 벌인 사업이 순항할 리 만무했다. 종자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월급이 6개월 가량 밀리면서 직원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IT 업체에 투자금이 몰려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우선 자금난을 해결할 요량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정보화 추진 사업 수주를 게임개발과 병행해 나갔다.
1999년 1년 여 동안의 노력 끝에 첫 작품인 ‘파이널오딧세이’를 내놓았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유통업자에게 계약금과 로열티를 받기로 했지만 게임이 안 팔리다 보니 계약금 3,000만원으로 끝이었다.
그는 기술력이라도 축적했다는 것을 위안 삼아 1년 여 동안 게임 개발에 매진해 후속작인 ‘아트록스’를 내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게임을 접한 사용자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독일과 영국 등 세계 11개국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동안의 게임들은 대부분 컴퓨터에 CD를 넣어 구동하는 패키지 게임. 하지만 워낙 불법 복제가 기승을 부리면서 게임 업체들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대안은 복제가 불가능한 온라인 게임뿐이었다.
2002년 온라인 게임 제작을 위한 구상에 들어갔다. 직원들과 밤낮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던 중 한 직원의 입에서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전 대표는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실크로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데다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게임이 진행될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양한 문명을 녹여 넣을 수 있어 세계적인 게임으로도 손색이 없었다”고 당시 떠올렸다.
또다시 대장정이 시작됐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동용 게임 개발을 병행했다. 창투사에서 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었지만 IT 버블 때 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업체들을 보면서 결과물이 늦게 나오더라도 스스로 자금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2005년 드디어 실크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대수준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국내 시장 3위권을 노렸지만 결과는 10위권을 맴돌았다. 전 대표는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낙담하지 않았다.
정말 업그레이드로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하면서 중국 일본 대만 등에서 러브콜이 잇따랐다.
그 때부터 탄탄대로였다. 전 대표는 그 동안 게임을 현지 유통업자에게 파는 B2B 방식에서 벗어나 업계에서는 처음 직접 게임 서버를 구축해 게임 유저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B2C 방식을 도입했다.
이 방법은 게임 제작업자와 유통업자 간의 마찰을 피할 수 있는데다 수익도 더 많이 나는 구조였다. 지난해에는 매출액 97억원 중 90% 가량을 해외에서 올렸다. 게임업계에서는 드물게 무역인상까지 수상했다.
실크로드가 모습을 드러낸 지 2년이 넘으면서 전세계 유저의 수가 1,500만명을 돌파했다. 10월에는 세계 게임 유저들이 조이맥스의 사이트에서 원하는 게임을 할 수 있는 포털까지 열었다. 그의 꿈은 하나 둘 실현됐다. “전 세계 게임 유저들이 자주 찾는 게임계의 유투브나 구글을 만들고 싶어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포털에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개발에 전념할 겁니다.”
● 전찬웅 대표의 경영 철학/ "게임의 90%는 사람이 좌우"
'사람만이 희망이다.' 조이맥스 전찬웅 대표가 어느 업계보다 부침이 심한 게임업계에서 회사를 지켜오면서 깨달은 인생 철학이다. 게임 자체가 개발자들의 아이디어가 함축된 산물인 만큼 사람이 잃으면 게임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 대표는 사업 초기에 경영난과 잇따른 제품 실패를 겪었던 터라 자신을 믿고 따라 준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애정은 경영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경영도 사람 간의 신뢰가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기별 매출 실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사업 초기에 약속했던 성과급도 사정이 나아지자 곧바로 지급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월급을 주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릴 지켜준 직원들이 있었다"며 "게임의 90%는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사람이 좌우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애정은 게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그의 게임들은 패자 부활전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한 경우가 많다. 초기에 내놓은 파이널오딧세이나 최대 히트작인 실크로드는 모두 처음 내놓았을 때는 시장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업체처럼 아예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기 보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방법을 썼다. 게임이 처음에는 볼품 없더라도 애정을 쏟아가며 가꾸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화초와 같다고 봤기 때문이다.
또 IT 버블 시기를 거치면서 한 순간의 유행을 따르기 보다는 진득하게 성과를 내는 데 주력해 왔다. 전 대표는 "게임업계처럼 유행과 인기가 거품처럼 일었다가 사라지는 곳도 드물다. 하지만 유행에 영합하기보다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소걸음처럼 가는 게 경쟁이 치열한 게임업계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비결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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