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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5>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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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5>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입력
2007.11.22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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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저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본인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 1권을 기획한 출판인으로서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그 책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 권의 책은 살아 있는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입니다.”

2004년 5월 한 출판사 대표가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됐다. 1979년 10ㆍ26사건 이후 판매금지 조치로 문화공보부에 압수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 1권 500권을 돌려 달라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간곡한 호소를 담은 편지였다. 이 책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 출간이 다시 허용됐지만 김 대표는 압수된 500권에 일종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1979년 10월 15일 발행된 1권을 시작으로 10년 간 송건호, 진덕규, 백기완 등 60여명의 필진이 참여, 전 6권으로 출판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의 지나온 길을 살펴보면 이 같은 책의 의인화도 무리는 아니다.

해방 전후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시기이면서도 1980년대까지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더욱이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 탄생한 1970년대 말은 민족적 상황과 정치현실에 대해 문제의식만 가져도 수난을 당하던 때여서 일제로부터 벗어난 1945년 전후의 역사를 민족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금기를 깬 파격적인 시도였다. 자연히 책은 발간 직후부터 젊은 지식인과 학생 사이에 일명 ‘해전사’로 불리며 회자됐다.

격동하는 역사과정에서 태어나 수난 받고 또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 해방 전후 민족의 역사와 꼭 닮아 있기에 책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도 엉뚱한 소리만은 아닌 셈이다.

책은 논문집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을 전후한 우리 민족사의 이해에 개괄적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 1권은 5개의 장으로 나누어 총 12편의 논문을 담았다.

기본적으로 저자들은 8ㆍ15를 단순한 해방의 의미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8ㆍ15가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해방의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나 민족 지도부의 역량 부족으로 미군정 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미군정에 대한 시각도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이전의 여러 연구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은 해방군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때문에 한국 분단을 묵인한 분단의 책임 당사자 성향이 강하다.

또한 미군정의 몰이해로 일제 잔존 세력이 재등장해 친일 청산이라는 식민역사의 정리 작업이 불가능해졌다는 게 이 책의 지적이다. 저자들은 또 독립의 주체 세력으로 대표되는 김구, 이승만, 여운형 등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당연하게 여겼던 ‘김구=독립운동가’, ‘여운형=공산주의자’ 식의 단순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 학생과 젊은 지식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2권이 나온 것은 1권 발매 후 만 6년 만이었다. 2권은 책이 시대의 소산이자 사회운동 속에서 재탄생하는 산물임을 입증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을 읽고 공부한 몇몇 젊은 지식인들의 논문이 2권에 실림으로써 그들이 독자에서 필자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8ㆍ15 직후 정치지도자들의 노선비교(김광식)’,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홍인숙)’, ‘미군정의 교육정책(이광호)’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발간 이후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젊은이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자 정치권이 견제를 하고 나섰다. 1985년 11월 하순, 정부와 민정당은 격화되는 학원사태의 발생이 8ㆍ15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원인이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은 “일부 대학생들이 8ㆍ15 이후의 현대사를 독재ㆍ부정선거ㆍ장기집권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역사가 야사ㆍ비사ㆍ소문에 의해 오염되고 흥미 위주로 왜곡되는 것도 사회혼란의 근본요인이 되고 있으니 현대사를 시대별ㆍ정권별로 재정립하는 일이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1987년에는 3권이, 1989년에 4~6권이 출간됐다. 우리 현대사가 혁명적으로 격동하던 70, 80년대 10년을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 젊은 지성인들과 함께 한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사회과학 서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권의 경우 약 40만 권이 팔려 나갔다. 출판 기획자와 필자들의 의지와 이론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정치평론가 고성국씨는 “<해방전후瑛?인식> 은 냉전 시대에 잃어버린 반쪽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 굉장한 위험 부담을 안고 서술된 책”이라면서 “정규 교과과정에서 전혀 배우지 못한 역사가 서술돼 있어 대학생이었던 나를 비롯해 당시 젊은이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같은 시도가 있어 후학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학문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됐다”면서 “한국 지성사에 있어 실천적 의미를 띠는 최고의 학문적 성과를 올린 책”이라고 강조했다.

■ 송건호·백기완·강만길·김윤식…역사학자·언론인 등 59명 공동집필

직접 목차를 짜는데 관여한 제 1권의 대표 필자 고 송건호씨는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낸 한국의 대표 언론인이다.

그는 2001년 별세했으나 2002년부터 그의 기자정신을 기린 송건호 언론상이 제정돼 매년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도 제 1권의 주요 필자 중 한 사람이다.

김 사장은 서울대와 미국 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피츠버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서울대 교수, 인천대 총장, 한국정치학회장 등을 지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백범사상연구소 창립자로, 김구의 사상과 행동을 분석한 그의 논문이 제 1권에 실렸다.

지난 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제 2권의 필자로 참여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상지대 총장을 지냈다.

2~5권 필진 목록에 이름을 남긴 고 김남식씨는 북한연구가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통일부,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등에서 현대사와 통일 관련 연구에 한평생을 바쳤으며 2005년 별세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제 2권에 지식인 작가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해방전후 문학을 분석한 논문을 실었다.

그는 100여종의 저서를 펴내 문학예술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거대한 학문적,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을 비롯해 60여명의 학자들이 <해방전후사의 인식> 집필에 동참했다.

■ 김언호 한길사 대표 인터뷰

"1980년대는 책을 만들어 읽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한 '책의 시대'였습니다."

김언호(62) 한길사 대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을 통해 한국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면서 기획자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책의 출발은 그의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남북 분단의 원인은 무엇일까. 과연 외세에 의해서만 분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만 해도 해방 전후사를 제대로 논의하는 것이 아직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였지요. 하지만 으레 해방만을 떠올렸던 8.15 전후의 역사를 해명해야만 우리 자신과 관련된 사회과학이 비로소 맥락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김 대표는 '독자로서 나부터 읽고 싶은 책을 만들자' 마음먹었고 이렇게 해서 젊은 학자들의 논문을 모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 탄생했다. 그는 일종의 논문집인 이 책이 열흘 만에 4,500부나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책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한 권의 책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창출되는 게 아닙니다. 책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 또는 사회적 정서와 사상이 엄연히 존재하죠. 결국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1980년대를 살아 온 우리 모두의 공동작업이자 성과입니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기획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여러 사회과학 서적의 모티프가 되는 등 역사인식운동에 불을 지폈지만 이 때문에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초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의 편향성을 문제 삼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이 출간되기도 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책에는 자유 민주주의 학자의 글도 있고 민족적 진보주의 학자의 글도 있습니다. 학문과 지성의 세계라면 보수도, 진보도 존중돼야지요.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사회 변화에 따라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매체도 달라져 영상과 인터넷이 정보를 얻는 중요한 미디어가 됐지만 여전히 책은 지식과 사상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지만 책은 또 사람을 만들지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을 심어준 책입니다. 바로 그런 책이 우리 시대의 명저가 아닐까요."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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