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다.
민감한 현안들이 급부상한 가운데 열리는 양국의 정상회담은 그 결과에 따라 향후 미일관계의 지형을 흔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양국이 서로 주고받을 것이 많지 않아 회담 결과에 대해서는 낙관만은 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집권 후 첫 해외 방문국으로 미국을 선택한 후쿠다 총리로서는 우선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일본의 외교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총론적인 입장에서 부시에게 접근한다는 전략이다.
미ㆍ일 군사동맹의 상징이던 인도양 해상자위대의 급유 활동이 중단되고, 북한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이 차이를 보이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과의 신뢰를 재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권 기반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7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 10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이어 후쿠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맹방관계 복원을 통해 이란의 핵개발 저지는 물론 중국ㆍ러시아와의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후쿠다 총리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일본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속내이다. 후쿠다 총리는 일본인 납치문제의 진전 없이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면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정상회담 직전 고위 외교관을 미국에 파견해 양국 관계에서 이 문제가 차지하는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일본의 납치피해자 가족이 11일 미국을 방문,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를 만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미국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힐 차관보는 12일 "(일본의) 납치피해자 가족에게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정국 해제라는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얼마나 납치문제의 진전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라며 점잖게 거절하는 분위기다.
흥미로운 것은 후쿠다 총리의 방미 날짜다. 미국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려면 지정 해제 발효 희망일 보다 45일 전에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 절차를 바탕으로 역산하면 북한에 대한 연내 지정 해제 마감일은 정상회담이 열리는 16일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으나 '정상회담 전에는 지정해제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이 담긴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가 향후 미일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국이 지정 해제를 할 경우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반미 감정이 확산되고, 이 때문에 미일동맹이 심각하게 손상되는 사태가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후쿠다 총리는 참의원에서 압승한 민주당의 반대로 인도양에서의 급유지원활동이 중단된 사태에 대해서는 그 동안의 경위와 상황, 일본 정부ㆍ여당의 재개 노력 등을 직접 설명해 이해를 구하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급유활동 재개를 위해서 국회에 제출한 새 법안 통과에 대해 일본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전달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양국이 합의했지만 일본 국내 사정으로 지체되는 주일미군기지재편 문제와 후쿠다 정권이 들어선 뒤 부상한 주일미군 주둔경비에 대한 지원 축소 문제 등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설득한다는 자세지만 어느 선까지 미국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도쿄=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 고이즈미는 '밀월'→ 아베는 '갈등'→ 후쿠다 어느 길?
2001~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 시절의 미일관계는 외교ㆍ안보의 측면에서 ‘미일합체’로 불릴 정도로 역대 최고의 밀월을 과시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이즈미 총리의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일점돌파(一点突破)식 대미접근전략이 사상 최강의 미일동맹을 구축할 수 있게 했다.
미일동맹의 강화가 가장 안전한 ‘안보 보험’이라는 전후 일본의 외교ㆍ안보적 인식을 극도로 강조한 것으로, 고이즈미식 ‘미국 올인’ 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2003년 유엔 결의 없이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지원국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등장한 것이 고이즈미 총리였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선언은 물론 일본 국내 상황에서 힘들 것으로 생각했던 안보관련 법제정비를 통한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에 이르기까지 고이즈미 총리는 그야말로 물심 양면으로 미국을 지원했다.
감격한 부시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출 문제 등 양국간에 민감한 현안이 부상할 때마다 “내 친구 고이즈미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측근에 지시하는 등 극진하게 배려했다.
문제는 이 시절의 밀월관계가 부시와 고이즈미의 개인적 친분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국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베 총리가 신자유주의자였던 고이즈미와는 달리 ‘전후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보수ㆍ우익 성향의 이념을 앞세운 지도자였다는 점도 작용했다. 지난해 아베 총리가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자 미국측이 일본에 정색을 하고 압력을 가한 것은 양국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을 전면에 내세웠던 아베 총리의 대북정책도 임기말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던 부시 대통령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북한과 관계 개선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미국의 ‘배신’에 울분을 터뜨렸다.
여기에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성 장관과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무성 장관 등 아베 내각 각료들이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공격에 대해 비판하면서 미국측이 불쾌감을 토로했고, 수면아래에 있던 미국산 쇠고기 수출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는 등 양국관계는 갈등모드로 전환하는 양상을 보였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정권 들어서면서 양국관계에 대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한탄이 나오는 지경이 됐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양국의 공조체제와 북한문제 등 주요 현안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후쿠다 총리는 9월 취임 이후 미일동맹을 주축으로 하는 아시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이 참의원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후쿠다 총리가 미일동맹을 어떻게 유지해 나갈 지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도쿄=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 美 "일본 협조 절실… 압박보다는 설득"
미국 입장에서 미일 동맹은 한미 동맹과 함께 대아시아 정책의 기본축에 해당한다.
미국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에서도 미국 외교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인된다. 한ㆍ미ㆍ일간 삼각 동맹에서 미국이 일본을 더 우선시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생겨날 때에도 가급적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동맹간 공조를 모색하는 방향에서 조용히 대처한다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은 일본을 공개 압박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설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일단 미측은 연내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키로 한 합의가 반드시 고정 불변의 철칙은 아니라는 점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실무진에서도 일본인 납치 사건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의 경직된 자세에 많은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는 납치문제의 진전과 북한의 전면적 핵 프로그램 신고의 진실성 등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 이후에 이뤄질 수 있는 ‘조건부’라는 점을 앞세워 일본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가 아직 초기 단계이고 핵 프로그램 신고의 전망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테러지원국 연내 해제는 사실상 어렵다는 점도 미측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일본이 납치 문제 진전의 수위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북핵 6자회담 자체의 추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이 적당한 선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강력한 주문 사항이다.
미국이 일본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여러 사안에서 일본의 협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에 발목이 잡혀 있는 미국으로서는 각종 분쟁지역에서 경제력을 앞세운 일본의 지원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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