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광주ㆍ전남 지역 레미콘 업체들이 공정거래위에 담합을 인가해 달라고 신청해 화제가 됐다. 올들어 담합행위 척결의지를 누차 강조해온 공정위에 대해, 그것도 평소 요주의 대상으로 가장 지목 받던 레미콘 업계가 자기들끼리 가격과 물량을 조정ㆍ배분하겠다고 '간 크게' 나섰으니 말이다.
명분은 지방 건설경기 부진에 대처하는 산업 합리화와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이고, 근거는 '효율성 증대가 경쟁제한의 피해보다 클 때' 예외적으로 담합이 인정되는 관련법 조항이었다.
● 대ㆍ중기 상생협력 헛발질만
더 눈길을 끈 것은 공정위의 반응이다.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댈 줄 알았더니, 의외로 신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수요업체의 의견을 수렴한 뒤 전체회의에서 논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시멘트 가격은 최근 1년 새 10% 가까이 인상됐으나 대기업 건설사들의 압력 등으로 레미콘 가격은 전혀 올리지 못한 탓에, 영세한 레미콘 업계가 집단 도산위기에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다. 이들이 한때 레미콘 납품거부까지 검토하다 담합시비를 낳자 물러선 것도 감안된 듯 싶다.
이 사례는 참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로드맵이 말 잔치 속에'속빈 강정'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2005년 5월 처음 열린 청와대 상생회의가 올 9월 5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매듭되자 마자 정부는 실적을 자화자찬하기에 바빴다.
상생협력이 기업의 유효한 경영전략으로 인식되고 양극화 해소의 단초와 동반성장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또 상생 전담조직을 가진 그룹이 2년여 만에 4개에서 19개로, 관련 투자액은 1조원에서 2조원으로 늘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달 말 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갖가지 불공정 행위 사례를 담은 백서를 발간했다."그 동안 보복이나 피해가 두려워 입을 닫고 있었지만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이젠 누군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회견과 백서엔 일방적 납품단가 인하와 발주계약 취소, 원자재 값 인상과 환차손 등의 납품업체 전가, 부당한 특허침해 등 기술 탈취, 하도급대금 미지급과 이면계약, 무분별한 중소기업 영역 진출 등 생생한 증언이 쏟아졌다.
이 자리에선"9월 청와대 상생회의 때 대기업 총수들에게 별도로 만날 것을 제의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는 말도 나왔다. 대기업들이 이미'유가 100달러대, 환율 800원대'를 전제로 내년 경영계획을 짜면서 원가 절감을 유독 강조한 터에 회동마저 거부 당했으니, 중소기업들은 두려움을 느낄 만도 하다.
한편으로 수출 호황에다 내수까지 살아나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사회 구성원 간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지, 설명이 된다.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좁은 아랫목만 펄펄 끓일 뿐, 웃목의 냉기는 도통 돌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 기업생태계 경쟁에 눈돌려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어떤 자리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도의 고공행진은 '구세주 신드롬'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뭔가 되는 일이 없고 살기도 힘들어지니 어디선가 구세주가 나타나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국민들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제조업 고용의 80%, 사업체수의 99%를 점하는 중소기업의 열악한 수익성ㆍ생산성ㆍ소득 등의 실상을 겹쳐보면 수긍이 간다.
그러나 유씨의 통찰력은 거기서 그친다. 그 공백을 메운 사람은"대기업을 불러'상생협력 하시오'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기업생태계 간 경쟁에서 이긴다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설파한 노무현 대통령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의 장ㆍ단점을 잘 알아 상호 보완하는 선순환적 생태계를 만들어야 경제가 잘 굴러간다는 것이다.
그 역할은 정부 이전에 대기업이 해야 한다. 정부가 규제를 일삼는다고 투정하기 전에 중소기업을'밥'으로 여겨오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대선 후보들의 중기정책 출발점도 여기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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