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차가운 하늘이 열리면서, 산사로 올라가는 흙길엔 사각거리는 가을이 내려앉았다.
정갈한 숲속,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기 위해 떠난 곳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 자락의 대승사가 거느린 암자 묘적암과 윤필암이다.
윤필암 못미쳐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차단기 너머 숲길로 터벅터벅 걸어올랐다. 숲은 깊었고 나무들은 높았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면 황톳빛의 싱싱한 낙엽비가 쏟아져 내린다.
사각이는 낙엽의 소리에 집중하며 5분 가량 올랐을까.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계단 끝에 6m 높이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가부좌를 튼 마애불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다시 묘적암 가는 길로 내려와 낙엽 소리에 집중한다. 가을 산속의 암자로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선(禪)에 드는 길이다. 한발 두발 걸으며 내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묘적암 가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 길가에 약수터가 보인다. 빨간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고 말간 물 한잔 떠서 목을 축였다. 이 먼 곳 가을의 순례길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던 그 깊고 고질적인 갈증이 한번에 씻겨지는 느낌이다.
묘적암은 고려 말의 나옹선사가 출가한 곳이다. 성철, 서암 등 현대의 고승들도 깨달음을 얻고자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나옹선사가 이 약수를 떠서 끼얹어 멀리 해인사의 불을 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약수터 오른쪽 산기슭에는 부도가 2개 있다. 처음 것은 기우뚱한 모습인데 뒤쪽의 것은 좀더 의젓한 모습으로 서있다. 앞에 것은 동봉선사, 뒤쪽은 나옹선사의 부도라 한다.
마지막 모퉁이를 올라섰다. 두툼한 낙엽 카펫 위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치고 들어오자 오솔길은 황금빛으로 빛이 났다.
고목의 그루터기 너머로 보이는 묘적암. 흙담에 소박한 대문을 한 암자는 여느 시골집 같은 분위기다. 산속이라 벌써 찬기운이 깊은지 문과 창문은 비닐로 꽁꽁 덮였다.
입구 팻말에 이곳은 선원이니 출입을 삼가해달라고 써있다. 나를 찾아 떠난 낙엽길에서 정진하는 스님의 깨달음을 방해해서야 쓰나. 조심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다람쥐와 동무하며 가볍게 내려왔다. 주차장 못미쳐 왼쪽으로 소담스런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그 소박함에 이끌려 산허리를 돌아서니 바로 윤필암이다.
묘적암과 윤필암을 품은 사불산의 이름은 산 중턱 거대한 암반 위에 서있는 사불(四佛)바위에서 유래됐다. 이제는 거의 닳아 없어진 마애불이 4개의 면에 새겨진 바위다.
삼국유사가 기록하기를 붉은 천에 싸인 바위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고 그 네 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신라 진평왕이 몸소 찾아와 예를 올리고 대승사를 창건했다.
윤필암은 묘적암과 달리 규모가 제법 컸다. 전통 암자라기보다 펜션같이 예쁜 약간 현대화된 사찰이다. 관음전 앞마당을 지나 벼랑에 서있는 사불전에 올랐다 사불전에는 불상이 따로 없다. 커다란 유리창을 사불바위 쪽에 내, 창 밖 사불바위를 모신 법당이다. 법당 안에 들어가 허리를 굽히면 사불암을 우러를 수 있다.
사불암에서 바라보면 윤필암을 감싼 산세가 참으로 아늑하다. 이제 절정으로 치닫는 단풍도 곱게 내려앉았다. 윤필암은 현재 20여명의 여승들이 수도하고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관음전 앞에는 최근에 쑤어놓은 메주가 가을볕에 꾸덕꾸덕 마르고 있다. 사불전에선 목탁 소리가 들려오고 관음전 뒤편에선 보살님들의 말간 웃음소리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문경=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천년고찰 대승사·김룡사… 절로 가는길 "너무 곱구나" 감탄사 절로
문경시 북동쪽인 산북면 자락에 천년고찰 두 곳이 이웃하고 있다. 대승사와 김룡사. 신라 진평왕 9년(587년), 10년에 나란히 지어졌다. 두 곳 모두 절이 자리한 터와 그곳으로 들어가는 절길이 엄숙하리만큼 곱다.
대승사는 성철 스님이 3년 동안 눕지 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로 용맹정진의 모범을 보인 곳이자,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밥 한 덩어리에 김치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며 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대승사는 우람한 솔숲과 어우러진 일주문에서 감탄했다가 절 입구의 생뚱맞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서 낙담을 하고 만다. 지금 한창인 불사로 중장비의 소음이 요란하다.
기왓장으로 담을 쌓은 돌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앞 뜰은 탑 하나 없이 허전하다. 석등 대신 노주석이 두 기 서있다. 밤에 관솔불을 피워 마당을 밝히는 것이다.
김룡사는 대승사 건너편 운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운달조사가 창건해 처음엔 운봉사로 불려졌던 사찰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용으로 장식된 약수터를 볼 수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험상궂은 모습의 사천왕상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몇번의 화재로 대부분 불에 타 중창을 거듭했으나 1997년에 다시 큰불이 나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불전이 사라졌다. 경내의 설선당은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방으로 이름났던 곳. 최근에 복원됐다.
김룡사는 풍수지리상 누운 소의 형상이라고 한다. 산의 맥을 보전하기 위해 석탑과 석불을 절 마당이 아닌 절 뒤에 두었다. 그 생김새들이 토속적이다.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처럼 아무렇게나 쌓고 아무렇게나 깎아놓은 듯, 못생겼지만 그래서 더욱 정이 가는 석탑이고 석불이다.
■ 여행 수첩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나들목에서 나가 시내를 거쳐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방향으로 간다. 산양에서 59번 국도를 만나 좌회전해 단양, 제천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대하리에서 왼쪽 길 923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한적한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풍성하게 우거진 나뭇가지가 도로를 덮어버리는 까닭에 딱 차에 부딪힐 부분만 가지를 친 묘한 생김새의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간곡리 지나 오미교에서 김룡사와 대승사 가는 길이 갈린다.
△대승사와 김룡사 주변에 특별한 맛집은 없다. 산양 바로 옆은 예천군 용궁. 이곳 용궁시장 안에 있는 단골식당은 저렴하면서도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다. 순대국밥(3,000원)과 함께 석쇠로 구워내는 돼지불고기(6,000원), 오징어불고기(5,000원), 닭발구이(5,000원), 닭불고기(6,000원)가 일품이다. (054)653-6126
이성원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