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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나무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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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나무 살리기

입력
2007.11.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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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면서 출근 길에 아파트 산책로를 돌아 나가는 기쁨이 커졌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나 노랑에서 빨강까지 갖가지 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와 벚나무, 서로 다투듯 붉은 색으로 물든 단풍나무, 신나무, 마가목, 복자기가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작은 잎을 여러 색으로 아기자기하게 물들인 백일홍이나 회양목도 예쁘다.

산수유와 산딸나무 잎이 피워 올린 깊고 짙은 빨강색은 가슴을 팍 찌른다. 가장 큰 놀라움은 화살나무다. 처음에는 창백한 분홍색인가 싶더니, 점점 맑고 투명한 빨강색으로 바뀌며 발길을 잡는다. 단풍 놀이가 따로 없다.

■겨우 2년밖에 안 된 아파트 단지인데도 조경에 많은 신경을 쓴 듯 군데군데 작은 숲이 만들어져 있다. 나무 종류를 대강 꼽아보아도 30종을 훌쩍 넘는다. 대나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향나무 주목 메타세콰이어 진달래 철쭉 영산홍 자산홍 싸리나무 꽃사과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이팝나무 계수나무 목련 라일락 감나무 대추나무 자작나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름드리 참느릅나무와 낙우송까지 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재개발이 예정된 저층 아파트라면 으레 건물보다 높이 자란 나무숲에 묻혀 있다.

■그러나 이때가 나무들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얼마 전 집 근처 아파트단지가 재건축 공사에 들어갔다. 좋은 나무가 한둘이 아니었고, 봄이면 꽃잎을 비처럼 뿌리는 커다란 살구나무와 벚나무가 특별히 멋졌다.

재건축 공사가 시작된 후 둘러보니 모두 잘려나가 버렸다. 그루터기의 나이테는 하나같이 30개가 넘었다. 옮겨서 보관하는 일이 성가시기도 했겠지만, 재건축조합이나 건설업체나 알 듯 모를 듯한 이유로 새로 사다 심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마구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구는 나무 토막을 보며 표적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풍부한 녹지로 유명한 서울 강동구 고덕주공아파트가 재건축 공사에도 불구하고 단지 내 나무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고 한다. 생명을 건지게 된 나무가 5만 그루에 이른다.

뜻을 모은 주민과 업체, 행정당국에 박수를 보낸다. 단지가 워낙 커서 공사를 순차적으로 할 수 있어 나무들의 피난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다른 재건축 단지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다. 신록과 단풍을 즐길 줄은 알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베어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도시인들이 나무에 대해 베푸는 모처럼의 작은 보은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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