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10월. 페르시아만의 6개 산유국들은 즉각 가격 인상과 감산 조치에 나섰다.
이른바 ‘1차 오일 쇼크’였다. 72년 배럴당 1.9달러에 불과했던 두바이유 가격은 74년 10.7달러까지 치솟았다. 불과 2년 새 5배가 넘게 폭등한 것이다.
오일 쇼크는 주요 선진국들을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스태그플레이션’에 몰아 넣었다. 마이너스 성장 속에 두자릿수 물가 상승이 겹치는 ‘저성장-고물가’의 늪에 빠진 것이다.
물가를 잡으려고 긴축 정책을 쓰면 경기침체가 더욱 가속화되는 딜레마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74년 25.0%로 폭등했고, 이 기간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추락했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발언을 계기로 1, 2차 오일 쇼크 당시 겪었던 스태그플레이션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지난 8일(현지 시간) “앞으로 수개월 간 경제성장이 현저히 둔화할 것이며 유가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면서 우회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했다.
과거의 진원지가 중동 지역이었다면, 지금은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이 진원지다.
외견상 지금의 상황은 과거의 스태그플레이션과 많이 닮아 있다. 우선 지난해 말 배럴당 50달러 초반에 머물던 두바이유 가격은 90달러에 육박했다.
불과 1년도 안돼 유가 상승률이 80%에 육박한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물가 상승률, 경제 규모 대비 석유 의존도 등을 감안한 실질실효유가는 이미 1차 오일 쇼크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됐다.
‘중국발(發)’ 인플레 압력도 거세다. 중국은 수차례 긴축조치에도 불구하고 두자릿수 고속성장을 지속하면서 인플레 홍역을 앓고 있다. 원유를 비롯한 국제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까닭도 중국의 왕성한 ‘식욕’에 있다.
여기에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 경기의 둔화 조짐이 예사롭지 않다. 서브프라임모기지 파장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면서 신용경색, 주택경기 침체, 소비 둔화, 기업 투자 감소 등으로 조금씩 전이되고 있다.
3분기 3.9%에 달했던 미국의 성장률이 4분기에는 1.5%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이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에까지 치달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을 제외하더라도 일본,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의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고, 중국 등 신흥시장국들의 급부상도 글로벌 침체를 억제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버냉키 의장 역시 “미국 경제가 1970년대 상황으로 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어떤 대응 조치가 필요한지 준비하고 있다”며 지나친 비관을 경계했다.
무엇보다 1, 2차 오일 쇼크 당시와 지금은 세계 경제의 구조 자체가 많이 달라져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세계 경제가 다변화해 생산 기지가 많아져 공급 능력이 좋아짐으로써 고물가 충격을 상쇄할 수 있는 여지가 과거에 비해 넓어졌다”며 “성장이 둔화되는 속에 물가가 상승하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될 수는 있겠지만 극단적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스태그플레이션이란?
경기침체를 나타내는 stagnation과 물가상승을 의미하는 inflation의 합성어.
통상 경기가 호전되면 인플레압력이 커지고 경기가 악화되면 인플레압력도 줄어들지만,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선 경기는 나쁜데도 물가압력은 높아지게 된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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