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가슴으로 작품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머리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래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죠.”
절제와 버림의 미학을 추구해온 한국 추상조각의 원로 최만린(72). 최소한의 행위로 최소한의 드러냄을 실천하고 있는 그의 신작전이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2001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이후 6년 만의 개인전이다.
단순화한 인체형상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다룬 ‘이브’, 동양적 생명관을 유기적 구조로 담아낸 ‘태(胎)’, 추상화시킨 서체의 획으로 형태의 근원을 재현한 ‘점(點)’ 등 다양한 추상조각을 선보여온 그는 최근 인간과 자연, 우주를 상징하는 ‘O’ 시리즈를 통해 둥?E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내 작품에서 ‘O’이라는 제목은 숫자 ‘제로’나 불교에서의 공(空)을 뜻하기도 하지만, 제목에 얽매인 해석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표제 없는 절대음악처럼 작품의 내재율만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는 “언어로 작업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도 했다.
서울대 미대 교수(1967-2001)와 국립현대미술관장(1997-1999)을 역임한 그는 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경기고 재학 시절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교사가 국전에 대신 출품한 작품이 추천을 받으며 미대 진학을 결심하게 된 것. “집에다가는 경제학과에 지원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험을 치렀죠. 대학 4학년 때까지 저희 식구들은 모두 제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국전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 신문에 기사가 나면서 거짓말이 들통나게 됐죠.”
김종영, 김세중 등 대가들에게 사사하고 미대를 졸업했지만 생계는 어려웠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찾은 직업이 아나운서. 1958년부터 햇수로 3년간 KBS 아나운서를 하면서 성우 김소원씨와 결혼한 덕에 탤런트 최불암씨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최만린의 조각세계는 대개 10년 단위로 생성됐다 허물어지지만, 그렇다고 작품들에서 특별한 정형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의 작품들은 서양의 유명조각가도, 동양 불상도 닮지 않았다.
“제게 영향을 준 대가는 2만년 전 원시인들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심장소리를 들으려고 애써봤고,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도 기다려봤지만, 저를 감동시킨 것은 원시인들이 만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였어요. 원시의 그 정직함, 그게 제 작품의 실마리였습니다.”
우리나라 환경조형물의 확산에 기여해온 그가 회고하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 1977년 잠실주공아파트가 완공됐을 때 아파트 단지 한 곳에 추상조각 ‘태’를 설치했다. 아파트라면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빚은 동상을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주택공사 사장이 뭔지 모르겠지만 찜찜하다며 반대합디다. 그래서 일단 설치해보고 사람들이 싫어하면 작품을 철거하겠다고 약속했죠.”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더니 “뭔지 모르겠지만 좋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던 것. 뭔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적이고 함축적인 그의 작품들은 30일까지 전시된다. (02)734-0458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