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초(楚) 나라는 남쪽 '오랑캐의 나라'였지만 장왕(莊王)에 이르러 중원 제후국을 넘어서는 국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중원 제후국들은 현실에 애써 눈을 감은 채 초나라를 좀처럼 중원 패권 다툼의 당사자로 여겨주지 않았다. 부아를 삭이지 못한 장왕은 기원전 606년 대군을 이끌고 주(周)의 수도인 낙양(洛陽) 근처에 이르러 열병을 하며 군사력을 과시했다.
놀란 정왕(定王)이 왕손만(王孫滿)을 보내자 장왕은 다짜고짜 아홉 솥(九鼎)의 무게를 물었다. 이름만 남은 주의 권위를 내리깔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뜻이었다.
왕손만은 "천명을 받은 자는 아홉 솥이 아무리 무거워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고, 천명을 받지 못한 자는 아무리 가벼워도 움직일 수 없다"고 대답했다. 주의 힘이 아무리 약해졌어도 아직 천명을 잃지 않았고, 초의 힘이 아무리 커도 아직 천명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장왕은 서쪽 하늘을 쳐다본 후 회군했다. 오랫동안 중원에 머물며 초를 비워둘 수 없었다. 중원 제후국이 연대한 협공에 대비해 서쪽 강국인 진(秦)과 동맹을 맺어두긴 했지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진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알 수 없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 昌의 계산을 더듬으니
낙양에서 솥의 무게를 물은 것은 상대방의 힘, 즉 주를 떠받치던 중원 제후국의 힘을 가늠해 보려던 행위였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1대 1 가상 대결에서 우세를 확보한 것만으로 실행에 나설 수는 없다. 지켜보고 있는 제3자의 태도까지 감안해야만 자신의 힘의 상대적 수준을 잴 수 있다. 초 장왕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을 이 '상대적 균형'에 대한 고려는 '3자 게임'의 핵심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도 독자 출마 선언에 앞서 이리저리 '3자 게임'의 사고실험을 해보았을 터이지만 상식적 계산으로는 승산이 희박하다. 출마 소문만으로 20%의 지지를 얻었고, 출마 선언 후 24%로 지지율을 끌어올렸지만 앞으로의 지지율 상승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다.
그는 두 차례나 대선을 치렀지만 거대정당 조직에 터잡지 않은 선거는 처음이어서 조직력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또 한국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가 출마 선언에서 밝힌 '선명 보수' 노선에 끌릴 유권자는 그리 많지 않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비롯한 범여권 후보 지지율이 다 합쳐서 20% 남짓한 판세가 이어지는 한 40%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승리를 점칠 수 있다면 크게 보아 두 경우뿐이다. 우선은 '보ㆍ보 대결'의 결과로 보수와 중도보수, 중도 등 범보수 세력의 재편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이탈한 유권자들이 범여권으로 발길을 돌려 범여권 지지율이 30%를 넘어서는 경우다. 자신의 지지율을 10% 더 끌어올리면 된다. 그러나 이 때는 이른바 '범여권 단일후보'의 어부지리를 견제해야 하는 새로운 부담을 져야 한다.
이 때문에 이 전 총재가 범여권 지지율을 현 상태로 묶어두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극적으로 떨어뜨리는 두 번째 경우에 기대를 걸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박근혜 전 대표의 마음을 사고, '이명박 낙마설'의 확대재생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경선 승복 선언에 당연히 포함됐을 '협력 의무'를 대하는 박 전 대표의 소극적 자세로 보아 일단 이 후보와의 '박근혜 끌어당기기' 경쟁에서는 유리한 위치에 섰다.
● 천명보다 가벼운 주권?
말이 좋아 '한나라당 삼국지'지, 단순한 삼각관계에서의 줄다리기에 지나지 않는 이 싸움은 범여권 후보 단일화 논의와 마찬가지로 그릇된 전제를 깔고 있다.
유권자들은 지지 후보가 어디로 가든 졸졸 따라다니리라는 생각이다. 지역주의 투표 행태 등으로 잘못된 믿음을 준 유권자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권력을 얻겠다는 사람들이 주권자인 국민을, 먼 옛날 '오랑캐 임금'이 추상적 천명을 대하던 것보다도 가벼이 여길 수 있다니.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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