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신사동의 한 건물에서 디자이너 송자인씨의 2008 봄여름컬렉션이 열렸다. ‘한국의 스텔라 매카트니’라 불리며 국내 젊은 패션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디자이너의 쇼답게 무대는 섬세하게 만들어진 옷과 공들여 선택된 음악, 여운이 있는 움직임으로 눈길을 끌었다.
옷의 겉과 속을 해체하고, 상하의를 결합하고, 바지의 형태를 고민하며, 흰색부터 아이보리 카키 갈색 복숭아색까지 미묘하게 색을 변주하는 솜씨에서 디자이너의 영민함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그런데 컬렉션에 나온 옷들 만큼이나 눈길을 끈 것이 쇼가 열린 장소였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중간쯤에 위치한 반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은 애초 패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일 뿐더러 현재 건물 개보수를 위해 벽과 바닥을 다 뜯어낸, 말 그대로 공사판. 원래는 떡집이었으나 공사를 거쳐 연말에는 커피전문점과 와인매장이 들어설 곳을, 패션쇼 장소를 물색하던 디자이너가 건물주에게 특별히 허락을 얻어 하루 빌린 것이다.
천장의 배선관이며 시멘트와 벽돌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의 공간은 100명 정도마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작은 규모였지만 놀랍게도 패션쇼와 썩 잘 어울렸다.
마침 이날 컬렉션의 주제는 ‘컴포지션(Compositionㆍ구성)’. 옷의 구성과 옷을 이루는 각 구성물에 대한 디자이너의 관심이, 그를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대로 노출된 공사장으로 이끌었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최근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ㆍ스파)가 서울시가 주최하는 서울컬렉션에 불참하면서 내세운 이유 중 하나가 컬렉션장이 서울무역전시장으로 고정돼 있어, 디자이너가 창의성과 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컬렉션장 이원화 등을 요구했던 스파는 최근 20~23일 독자적으로 컬렉션을 개최한다고 발표했으나 결국 행사장소는 서울국립극장 한 곳 뿐이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천편일률적인 컬렉션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옷을 가장 돋보이게 해줄 특별한 공간에서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다.
무대와 조명장치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 모델들의 캣워크를 확보할 수 있는 일정한 길이를 갖춘 공간을 찾기도 어렵지만 개성적인 공간 확보를 위해 반대급부로 치러야 할 희생도 크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조명과 무대연출 등 모든 준비를 공간의 특색에 맞춰 따로 기획하는 데 따르는 비용 부담이다. 서울컬렉션을 통하면 서울시 보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공간 사용비를 개인적으로 부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지난 7월에는 디자이너 홍승완씨가 구 서울역사에서 컬렉션을 열어 큰 화제를 모았다. 송자인씨의 공사장 패션쇼 역시 파격성에서는 뒤질 바 없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역사성이나 현장성을 패션에 녹여내려는 시도, 구구하게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느니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패션쇼를 갖는 디자이너가 하나둘 나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패션쇼 관객 500여명 중 태반이 학생으로 채워지는, 세계 어느 패션컬렉션에서도 볼 수 없는 기현상을 이런 단독 컬렉션에서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기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