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을 이행하지 않기로 선언하면서 유럽 지역의 평화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 두마는 7일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 이행 유예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러시아의 세르게이 키슬리악 외무차관은 이날 “미국을 포함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이 러시아를 포위하려는 음모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재래식 무기를 철수하면 러시아 안보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결의안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상원의 승인을 거쳐 다음달 12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결의안이 시행되면 러시아는 현재 유럽 지역에 배치하고 있는 탱크, 헬리콥터 등의 재래식 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없게 된다.
러시아가 조약 이행 유예를 선언한 결정적 이유는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제(MD)의 일환으로 체코와 폴란드에 첨단 레이더와 요격 미사일 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사일 방어체제란 미국과 유럽이 미사일 공격을 받을 경우 미사일이 목표 지역에 도달하기 전에 파괴하는 방어 시스템을 말한다. 러시아는 자국의 앞 마당격인 두 나라에 미군 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자존심 차원을 넘어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가리켜 ‘히틀러 제국’이라며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불만을 드러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러시아의 논리에 미국은 밀리는 분위기다. 미국은 체코와 폴란드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는 명분으로 이란의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란 미사일은 최대 사정거리가 1,400㎞여서 유럽 지역을 공격하기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미국의 곤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최근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과정에 러시아 감시단이 참여하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러시아는 싸늘하게 거절했다.
러시아가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을 비준한 것도 명분에서 앞서 있다.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은 1990년 11월 나토 16개국과 구 바르샤바조약기구(WPO) 14개국이 재래식 전력의 보유 상한선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감축하기로 합의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1999년 재래식무기 감축의 당사자를 기존의 나토-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국가별로 하기로 개정했으며 러시아는 비준을 마쳤다. 그렇지만 미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은 조약에 나와있지 않은 몰도바와 그루지야에서의 러시아군 철수를 조건으로 내세우며 비준을 미루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은 이 달 말 나토 회원국인 독일의 중재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이견 조정에 나설 예정이지만 입장 차이가 워낙 커 해결은 요원하다. 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을 꿈꾸는 미국과 이에 맞서는 러시아의 충돌을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민주 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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