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의 고발 내용을 요모조모 뜯어 보니 수사 범위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상대는 세계적 기업 삼성이다. 하지만 검찰에 쥐어진 확실한 수사 단서는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된 계좌번호 4개 뿐이다.
더구나 고발 내용 중에는 기존의 검찰 수사를 뒤집을 만한 것도 있다. 차근차근 한 울씩 엉킨 실타래 풀 듯 수사를 한다 해도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내용은 구체적이다. 삼성 핵심 조직의 고위 인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임원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정ㆍ관계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을 관리하고, 심지어 수사와 재판의 증인과 증언까지 조작한 일 등 폭로 내용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출혈을 감내하고라도 사실 규명에 나서 볼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 SK가 SK글로벌 비자금 사건 이후 지배ㆍ경영구조를 혁신하며 새롭게 탄생한 예에서 보듯, 이 사건도 우리 사회와 기업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긍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부터 불필요한 샅바 싸움에 시간만 허비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김 변호사나 시민사회단체는 검찰 수사 진척을 봐가며 이른바 '떡값 로비 검사 명단'을 공개하거나 검찰에 제출한다는 입장이다.
사건 본질은 삼성 비자금인 만큼 먼저 수사에 착수해 김 변호사로부터 떡값 검사 명단을 알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떡값 검사 명단을 무기로 삼성 비자금 등 여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압박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려는 의도다. 반면 검찰은 떡값 검사 명단 제출이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사 도중이나 수사 후에 떡값 검사가 수사팀, 또는 수사 지휘 라인에 포함된 사실이 공개될 경우 수사의 신뢰도나 공정성, 검찰 조직의 명예가 추락하게 되는 만큼 그런 수사는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양쪽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기왕 검찰에 수사를 맡긴 마당에 김 변호사 등이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하지 않거나 검찰에 제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김 변호사 등은 검찰 수사를 통해 폭로ㆍ고발 내용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로 확인되길 기대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검찰이 허투루 수사하지 않는지 철두철미 감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원하는 방향과 수준으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검찰과 수사의 신뢰를 허물겠다는 발상은 명분이 약하다. 떡값 검사 명단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검찰을 믿지 못했다면 고발이 아니라 특별검사를 선택했어야 옳다.
명예훼손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떡값을 줬다는 구체적 내용이 적시돼 있다는 김 변호사의 주장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삼성 비자금이라는 본질이 떡값 검사라는 지엽적 문제로 희석될 수 있다고도 하는데, 떡값 검사 문제 역시 삼성 비자금 못지 않게 매우 중차대한 문제다.
김 변호사와 시민사회단체는 떡값 검사 명단,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남 이재용씨의 재산형성 관련 문건 등 '공정한 검찰 수사'의 전제로 요구되거나 수사에 도움이 될 물증을 하루 빨리 언론에 공개하고 검찰에 제출하는 게 좋겠다. 샅바 싸움에 너무 집착하다 본게임을 망칠까 우려되서 하는 말이다.
황상진 사회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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