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민주주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9월 일반 국민과 승려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미얀마 사태나, 지난 달 대통령선거에서 군 출신의 현 무샤라프 대통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후 위헌 논란과 더불어 민주인사들에 대한 폭탄테러와 국가비상사태 선포가 잇따라 발생한 파키스탄 사태 등 때문이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에서 발표한 세계 국가들의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 성적표를 보면, 최근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가 다시금 퇴보하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권위주의체제로 지칭되는 미얀마나 파키스탄은 차치하더라도, 86년 필리핀 민주화 이래 이른바 민주주의의 '제3물결'이라 불리며 민주화에 성공한 아시아의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들조차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의 9.11 사태 이후 국제적으로 강화된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국가들이 자국의 테러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 아래,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소수집단이나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의 인권을 탄압하고 정치적 폭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1988년 민주화 운동이 군부쿠데타에 의해 좌절된 이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경제적 제재조치를 받아 온 미얀마는 주변 국가들의 강력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밀접한 외교관계를 발판으로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군부 정권을 강화했다.
파키스탄 또한 9.11 사태 이후 이슬람 테러집단을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미국의 비호를 받아온 군부 정권이 지속적인 집권 연장을 시도하고 있다.
필리핀이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리주의운동에 대한 물리적 폭력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화되었으며, 동서남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이용한 일부 국가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정치권력의 반사적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 만연된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관행과 잘못된 정치의식도 민주화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편성에 대해 지역 문화와 정치경제적 환경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일부 정치지도자들에게 악용되어, 국가공동체 중심의 정치질서와 경제발전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근대화나 민주화를 서구적 가치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의 보편적 질서로만 매도하고 아시아적 특수성을 내세우는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태도는, 권력내부의 부패 문제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와 연결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권리를 무시한 정치권력의 억압과 통제로 표출되고 있다.
민주화에 성공한 신생 민주국가들이 민주적 법질서의 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퇴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체제 시기의 정치적 유산과 관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의 변화나 개혁만으로 그 공고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전진과 퇴보 사이에서 대내외적 환경과 정치행위자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다각적인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공고화는 단순히 제도적ㆍ절차적 민주주의의 구현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리더십과 시민사회의 모든 정치행위자들이 민주주의를 정치권력을 창출하는 유일한 '게임의 법칙'으로 인정하고, 그 내면화 작업을 함께 추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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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연세대 연구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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