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탈당 및 대선 출마 선언이 대선 정국에 긴장을 몰고 왔다. 안정적 지지율을 확보, 범여권의 거듭된 공세에 느긋하게 대응해 온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진영에 비상이 걸렸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비롯한 범여권 후보들도 '이회창 바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전 총재의 출마 선언은 꼼꼼하게 준비한 흔적이 역력하다. 뒤늦은 탈당과 독자 출마가 결국 경선 불복이고, 정계은퇴 선언의 번복으로 '대쪽' 이미지에 금이 갔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대한민국 살리기'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잃어버린 10년'을 청산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공교육을 재건하고, 국가 정통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능한 좌파 세력'의 재집권을 막아야 하는데, 한나라당 이 후보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그것이 얼마나 진솔한 설명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한나라당 이 후보에 대해 제기된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라는 점은 분명하다. 박근혜 전 대표나 '한나라당 당원 동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강조한 반면 의도적으로 이 후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애써 '한나라당 후보'라는 표현을 썼다. 특별히 이 후보를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이명박 낙마론'을 극적으로 강조했다. 그의 정치적 좌표로 보아 신당 정 후보 등 범여권의 주장과는 수용 효과가 크게 다르다.
자신이 '좌파 정권 종식'에 결과적으로 걸림돌이 될 경우 물러날 용의가 있다는 말조차 이 후보의 낙마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들릴 정도였다.
물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독자 출마의 최대 이유로 거론한 '이명박 낙마론'이 설사 개연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한 그의 출마는 결국 박 전 대표의 기회를 빼앗는 것일 뿐이다.
또한 그의 출마 선언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이번 선거에서 네거티브 공세가 치열할 것이라는 예고인 동시에 본격적 이념ㆍ노선 대결의 신호탄이다.
듣기에 따라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강한 의욕을 보인 법질서 회복, 대북 원칙론 등은 한나라당 이 후보와의 보ㆍ보 대결 속에서의 '정통보수' 논쟁을 부르는 한편으로 그 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이념ㆍ노선 대결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아 발을 굴렀던 신당 정 후보 등에게는 모처럼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래저래 선거 재미는 살아난 셈이다.
한편으로 그의 3차 시기(試技)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부(負)의 유산도 예정돼 있다. 2002년 당시 민주당의 '국민 경선'과 이른바 후보단일화로 시작됐고, 열린우리당이 헤쳐 모여 방식으로 신당을 만들고도 모자라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과제로 내건 데서 본격화한 정당정치 붕괴 조짐이 그의 출마로 더욱 뚜렷해졌다. 정당이 언제든 벗어 던지고 다시 걸칠 수 있는 싸구려 옷처럼 돼버린 상황은 안정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어떻든 선거는 이제부터다. 혼란이야 크지만, 유권자의 선택이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됐고, 제대로 된 노선ㆍ정책 대결의 필요성도 따라서 커졌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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