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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4>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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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4>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입력
2007.11.0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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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적 독립, 경제적 독립은 누구나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정신적인 밑받침이 될 사상적 독립을 위하여서는 그렇게도 대범한가.”

한국 사상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1972년 여름, 열암 박종홍(1903~1976) 선생은 한국사상에 무관심하던 당시 지식인을 준엄하게 꾸짖는 글로 <한국사상사> 의 첫머리를 열었다. 열암은 40대 중반 이후 한국사상의 두 날개인 불교와 유교를 천착했다. 국내 최초로 한국사상을 다룬 <한국사상사> -불교편이 그 서장을 연 책이다.

열암은 후속편 <한국사상사> -유교편을 준비하다 타계해 애석하게도 그가 정작 애지중지하던 유교철학은 책으로 엮어지지 못했다.

<한국사상사> 는 1960년대 중반 ‘한국철학사’라는 제목으로 <한국사상> 지에 연재했던 열암의 글을 모은 것. 연재글이다 보니 일관성이 부족했다고 느낀 탓이었을까.

그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저술로서 집필했다기보다 나 자신이 알고 싶은 일념에서 오랫동안 더듬어 온 자취인 것이요, 따라서 서술의 양식조차 제대로 통일되지 못한 점이 적지 않다”며 애써 저술의 한계점을 밝혔다.

이런 열암의 변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글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 단편적으로만 이어지던 불교사상 연구를 ‘사상사’라는 틀로 묶어 학문의 경지에 올려놨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책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꽃을 피운 고려시대까지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불교철학을 설명한다. 저자는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이 진리의 모습에 다가서고자 내세웠던 본체론과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 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한 신라 원측(圓測)의 유식(唯識)철학적 인식론에서 한국 불교사상의 뿌리를 찾았다.

책은 이후 통일신라시대 원효의 ‘화쟁(和諍ㆍ오직 진리를 따라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논쟁을 하나로 화합하게 하는 사상)’을 거쳐 자칭 미륵불이 출현할 정도로 혼란기였던 신라말 고려초의 정신적 추세를 담았다. 책의 대미는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의 철학이 장식했다.

책이 역사 속 다섯 사상가에 대한 이야기로 끝났다면 <한국사상사> 는 인물 평전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상가들의 철학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회통(會通)’의 정신을 찾아냈다.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 어느 것에도 속박됨 없이 자유롭게 구사되는 승랑의 논리와 유식사상가이면서도 그 편협성에 구애받지 않으며 진리에 대한 이견(異見)을 그러 모으는 원측의 자유로움, 분열된 불교사상을 하나의 근원으로 귀일시키는 원효의 화쟁 정신, 모든 불교사상의 겸학을 주장하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천의 넓은 시야, 그리고 선종과 교종, 돈오와 점수를 한데 엮어 한국 불교의 포괄적 수행체계를 정립한 지눌의 포용성. 이들에게 도도하게 이어지는 회통의 정신을 열암은 명쾌한 분석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암은 사상사의 기본 요건인 연속성도 빠뜨리지 않았다.

승랑과 원측의 사상을 보다 심오하고 근본적이며 전체적인 입장에서 화합시킨 원효. 원효에 대한 의천의 한없는 숭앙, 의천과는 달리 선의 입장에서 교를 포섭한 지눌. 이 같은 분석과 통찰을 통해 열암은 <한국사상사> 에 개별적 사실의 나열이나 인물 고찰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사상사를 담았다.

그러면서도 열암은 스스로 이 책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냈다. “우리의 사상이 우리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 사실인 만큼 경제적인 조건 또는 법률, 정치적인 태도 등등을 포함한 일반 문화 전반에 걸친 연구가 또한 보조를 같이하여 병행하여야 할 것임은 물론”이라는 머리말 후미를 통해 열암은 후학들에게 혈혈단신의 연구로는 이루지 못했던 한국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숙제로 남겼다.

● 인터뷰/ 열암기념사업회 소광희 교수

"열암 박종홍 선생은 우리나라 철학 연구의 개척자입니다. 1945년 해방 후 1950년대 말에 이르도록 '한국에 무슨 철학이 있겠냐'던 풍토는 선생께서 한국철학사 강의를 시작하고, 60년대 중반 한국사상연구회를 창립하면서 깨졌습니다. 비로소 '한국사상'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죠."

열암기념사업회를 10년째 이끌고 있는 소광희(73ㆍ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열암의 가장 큰 업적을 묻자 지체 없이 '한국철학 연구의 개척자'라는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식자층이라는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조차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한국의 사상?샤머니즘적 복합체' 운운하면서 격하했을 정도니 한국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했음을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열암은 한국사상 연구를 조용히 끌어갔다. 소 교수는 "열암 선생의 저술은 모두 14권인데 서양철학 소개서와 청탁을 받아서 쓴 짧은 글 모음집을 뺀 5권은 모두 <한국의 사상적 방향> <한국사상사> <한국적 가치관> 등 한국사상에 대한 논문입니다.

5권 모두 선생이 말년에 저술한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열암 선생의 사유의 축이 어디에 가서 머물렀는가는 자명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말년에 이르기까지 열암 철학의 중심이 오롯이 한국사상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한국사상 다음으로 그의 인생을 타고 흐른 것은 교육이다. 19세에 전남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해 서울대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대학시절을 제외하고는 40여 년간 오로지 후학양성의 길을 걸었다. 또한 열암의 최초의 학문은 한학,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교육에 대한 연구였다.

청년기 시절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획득했을 때도 그의 전공은 오로지 교육학이었다. 이것은 열암이 일생을 일관하는 실천적 주제의식이 '교육'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생을 교육에 몸담은 한국철학의 개척자'였음에도 열암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오명이 있으니 '독재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비판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고 있지만 열암에 대한 비판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5ㆍ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과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을 맡았었고, 정년퇴직 후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때문에 그의 성품, 학식과는 별도로, 그의 철학은 조선총독부와 박정희가 행한 억압과 폭력의 사상적 배경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열암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을 당시 조교였던 소 교수는 "국민교육헌장 제정 직후부터 몇 년간 선생은 불원천리하고 지방에 계몽강연을 다닐 정도로 참다운 민족중흥을 위해 애쓰셨다"면서 "국민교육헌장은 독재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의 교육칙어를 차용해 급조됐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진정 열암의 뜻은 참다운 국민교육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소 교수는 말년에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은 것에 대해서 열암의 개인적 상황에 주목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가 연금도 없이 100만원을 받고 정년퇴임하고 나니 생활이 막막했을 겁니다. 당시 열암 선생의 일기를 보면 '자식들 학비를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7남매니 오죽했겠어요. 그러던 차에 청와대에서 강압적인 제의를 누차 해왔죠. 열암 선생은 이참에 차라리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펴보자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수락했을 겁니다. 그 연세에 무슨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겠습니까."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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