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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내무반서 졸병 삶 걸고 '토지' 읽기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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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내무반서 졸병 삶 걸고 '토지' 읽기 덤벼

입력
2007.11.05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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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박경리의 <토지> 를 손에 들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 이십여 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덥석 펼쳐든 것은 잔뜩 찌푸린 하늘 탓이었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비 때문에 농사일을 손에서 놓고 날마다 방구석에서 시커먼 하늘만 쳐다보기 일쑤였다. 심심했다.

내가 방에서 하릴없이 뒹구는 그 시간에 고등학교 1학년생인 큰아이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을 읽고 있었다. 재미있게 읽는 눈치였다. 예전에 나도 그랬지.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지. 그 태백산맥을 다시 한번 넘어봐…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별안간 <토지> 가 떠올랐다.

이십사 년 전,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서 일등병 계급장을 갓 달고 정신없이 군대생활을 하던 때였다.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토지> 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그 책을 받았다. 하늘같은 고참병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던 살벌한 내무반에서 졸병인 나는 겁도 없이 <토지> 1권을 펼쳤다. 한 면을 2단으로 나누어 깨알 같은 글자를 세로쓰기로 편집한 양장본의 책. 그 첫 장을 넘길 때의 떨림과 긴장 그리고 스릴.

그날 밤 취침시간에 고참병이 나를 내무반 밖으로 조용히 불러냈다.“어이, 한승오. 니가 벌써 내무반에서 책 읽을 군번이야.” 그의 목소리는 실같이 가늘었지만 그 위압감은 동아줄처럼 굵게 내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그의 주먹은 내 가슴을 가볍게 툭 툭 쳤다. 잽 같은 펀치였지만 나에게 전달되는 심리적 무게는 헤비급의 주먹 이상이었다. 다음날 저녁, 나는 다시 <토지> 를 펼쳤다. 고참병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 뒤꼭지에 꽂히는 것을 생생히 느끼면서 한 장 한 장 <토지> 를 넘겼다. 물론 한밤중의 얼차려는 이미 각오한 상태였다.

그렇게 몇 번의 얼차려를 겪은 후, 나는 비로소 <토지> 를 내무반에서 읽을 수 있었다. <토지> 를 읽는 일, 그것은 졸병의 삶을 통째로 걸어놓고 덤벼들어야 했던 무모한 도박 같은 것이었다. 남다른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지난 여름 나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준령이 아니라 광활한 토지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한승오ㆍ농부ㆍ귀농일기 <몸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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