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언뜻 보기엔 평범한 아웃도어 웨어다. 꽤 세련됐다. 반짝이는 소재가 주는 미래주의적 느낌이나 형광 연두색의 앞 포켓 배색이 트레킹 무리에서 단연 눈에 띄겠다 싶다. 그런데 착용자가 재킷을 벗어 주섬주섬 옷을 접는가 싶더니 감쪽같이 배낭으로 변한다. 산에 오르느라 땀을 뺀 등산객이 바지 허벅지의 지퍼를 여니 바짓단이 툭 떨어지며 반바지가 된다.
# 2. 만원 지하철에 젊은 여성이 탄다. 재킷 앞뒤에 달린 장식용 어깨밴드의 끝쪽을 푸르더니 전철의 손잡이 대에 척 건다. 순식간에 아기 포대기 같은 임시 천의자가 만들어진다.
짐을 잔뜩 든 그녀, 이번엔 양쪽 바짓단 지퍼를 내리더니 그 안에서 긴 끈을 끄집어낸다. 양 다리 사이에 짐을 내려놓더니 그 끈으로 다리에 짐을 고정시킨다. 이만하면 지하철 안에서 살포시 잠이 든 사이 누군가 짐을 훔쳐 달아나는 일은 막을 수 있겠다.
신체를 보호하는 일차적 기능을 제외하면 멋 혹은 개성의 표현으로 정의되는 옷입기. 그러나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음악 듣고 채팅하고 메일을 주고받는 등 멀티태스킹(multi-tasking)에 익숙한 신세대들에게는 옷도 변형 가능한 어떤 것, 자유자재로 기능과 멋을 조합하고 해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26일 에스모드서울과 일본 패스닝 제조사 YKK가 함께 한 산학협동 작품전은 화제를 모은 할리우드 영화 <트렌스포머> 뺨치는 패션 트렌스포밍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트렌스포머>
‘Smart & Supplies’라는 주제로 열린 작품전은 지퍼와 단추 패스닝 벨크로 등 다양한 부자재를 사용해 일상의 옷이 얼마나 다양한 기능을 담을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안전ㆍ환경ㆍ실버ㆍ장애’라는 4가지 주제를 옷으로 풀어냈다. 기능과 멋,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어려운 시도였지만 신세대들은 형태뿐 아니라 기능까지도 변형을 추구하는 데 한계를 두지 않았다.
실버를 주제로 한 작품 ‘In&Out’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침대 시트가 순식간에 원피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평면으로 재단되고 지퍼로 앞여밈을 한 원피스는 지퍼를 열면 소매까지 쭉 터지면서 한 장의 시트로 변한다.
함께 입는 조끼는 뒤집어 접으면 간단한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가방이 되고, 바람을 불어넣어 야외에서 유난히 추위를 타는 노인들을 위해 방석 역할도 한다. 출품자인 노지연씨는 “혼자서 눕거나 일어나기 힘든 노인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이 간단하게 옷을 벗기고 입히면서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데 역점을 뒀다”고 말한다.
오토바이에 의지해 위험한 도로에서 생계를 꾸리는 퀵서비스맨을 위한 옷도 나왔다. 야간주행시 안전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은 직업이라 야광 스트랩을 부착, 패션성과 기능성을 고루 살렸고 핸드 프리(hand-free)가 필수적인 만큼 가슴 부위에 휴대폰이나 MP3를 넣고 이어폰 줄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뚫은 포켓을 부착했다.
바람을 가르고 달려야 하는 직업상 어깨가 추위에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어깨에 바람막이를 달았으며 이 바람막이 안에는 야간 주행시 안전확보를 위해 등에 늘어뜨려 고정시킬 수 있는 야광 안전밴드를 탈부착형태로 넣었다.
작업을 위해 실제 퀵서비스 요원들과 수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이영선씨는 “현대의 속도사회를 대변하는 퀵서비스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능을 옷이라는 패션상품에 담아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고 자평했다.
재래시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검은색 비닐과 오렌지색 양파망을 사용한 재활용 패션은 ‘재활용’이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탁월한 패션성을 과시해 눈길을 끌었다. 소매없는 A라인 원피스에 세로로 여러 개의 지퍼를 달고 지퍼를 열고 닫는 정도에 따라 원피스의 볼륨과 리듬감을 조절해 입을 수 있게 했다. 역시 양파망으로 만든 크로스백(어깨를 가로지르게 매는 가방)은 투웨이 지퍼를 이용해 일반적인 백팩(어깨끈이 두 개인 가방)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패션과 기능의 만남은 패션의 미래를 모색하는 작업이다. 최근 캐주얼브랜드 더블유닷이 아이팟과 손잡고 여성용 MP3 플레잉 웨어를 개발한 것이나 바이오산업쪽에서 특수 섬유개발을 통해 인체의 건강상태를 표시하는 의류 개발에 나서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첨단소재의 개발 대신 다양한 부자재와 아이디어만으로 옷의 다양한 변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품전 심사위원으로 나선 패션디자이너 루비나씨는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패션도 단순한 멋 외에 일상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요구 받는다”면서 “첨단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으면서도 디자인 아이디어만으로도 옷의 표정과 기능을 이토록 풍부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창의력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전에서는 트레킹을 할 때 기후변화와 상황에 맞춰 옷을 다양한 용도로 변형해서 쓸 수 있도록 한 디자인작업 ‘Water Resist’가 최고상을 받았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 오르비스, 글로벌 럭셔리 시장 잡는다
“우리 브랜드를 해외에 진출시키는 것만이 글로벌화라는 편협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좋은 외국 브랜드를 발굴하고 세계적으로 키우는 것 역시 한국 패션산업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니까요.”
이탈리아의 고급 악어백 브랜드 콜롬보 비아 델라 스피가(이하 콜롬보)를 수입판매하는 ㈜오르비스 인터패션(대표 이혜경)이 최근 이 브랜드의 전세계 판권을 확보, 세계 럭셔리시장 공략에 나선다.
이혜경 대표는 29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콜롬보&제니 패션쇼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탈리아 콜롬보 본사와 전세계 판권을 공유하는 자회사 설립에 합의, 2008년부터 향후 15년간 콜롬보의 영업을 총괄한다”고 발표했다. 내년 초 설립될 자회사는 오르비스와 이탈리아 콜롬보 본사가 3:7의 지분율로 참여하되 콜롬보는 제조에 전념하고 경영은 오르비스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대표는 “세계 럭셔리시장에서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갖는 힘은 유효하기 때문에 제품은 이탈리아 현지 생산이 원칙이다. 다만 경영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오르비스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며 “전세계 1%의 초고급 럭셔리시장을 무대로 다양한 마케팅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콜롬보는 1953년 밀라노에서 여성용 핸드백을 판매하는 부티크로 시작, 1960년부터 독창적인 악어가죽 핸드백을 제조하는 회사로 명성을 쌓았다. 검정이나 갈색 등 전통적인 색조에서 벗어나 오렌지 청록색 핑크색 등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제작기법을 동원한 독특한 제품을 생산한다. 모나코의 캐롤라인 공주 등이 애용하는 브랜드로도 알려져 있다.
반세기 이상 이탈리아 브랜드 특유의 가족경영체제를 고수했던 콜롬보가 유럽을 벗어나 미주와 중동시장을 겨냥하는 글로벌화의 막중한 책임을 한국의 패션업체에 맡긴 데는 오르비스 이혜경 대표의 경영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오르비스는 2002년 한국 판권, 2006년 아시아 판권(일본 포함)을 차례로 확보하면서 이 브랜드의 인지도와 위상을 크게 높였다. 변호사 출신으로 기자회견에 동석한 콜롬보 이탈리아 본사 마시모 모레티 사장은 “(이 대표의) 제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워낙 강렬해서 우리가 먼저 글로벌 사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09년초 뉴욕 또는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바이와 도쿄, 모스크바 등에 잇따라 매장을 낼 것이다. 악어백 전문 브랜드이지만 최고급 모피와 향수 등 상류층이 사랑하는 아이템들도 새로 추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진용을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 콜롬보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등에 10개 매장을 두고 있다.
이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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