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무대에서는 나갈 때까지 연기해야 해. 자기 대사가 끝났다고 그냥 나가면 극의 호흡이 무너지거든. 서로 마음을 맞추지 않으면 (연극이) 안된다.”
지난달 30일 밤 8시 서울 대학로의 한 빌딩 지하에 있는 서울문화재단 연습장. 유명 연극연출가 김종석 교수(용인대 연극영화과)와 10여명의 청소년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공기가 후끈하다. 3일 나루아트센터 무대에 오를 연극 리허설 현장이다.
간편한 청바지 차림도 있지만 학교에서 곧장 연습장에 온 듯 교복을 입은 채 감정표현에 몰입하는 10대들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청소년극단 단원들일까.
“처음 무대에 서요. 내 꿈에 다가가는 기회이기 때문에 흥분되고 기뻐요. 가장 좋은 건 여기서는 자유롭게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는 거예요.”(남윤정ㆍ원목고1)
촛불을 하나씩 든 채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알아요~’ 노래하며 무대 위 움직임을 정리하는 10대들은 무대경험을 말하려면 말 그대로 ‘생 초짜’, 평범한 고교생이거나 휴학생들이다. CJ문화재단이 사회공헌활동의 하나로 올해 처음 실시하는 ‘청소년연극워크숍’의 첫 참가자들. 모두 1,000여명의 지원자중에 서류심사와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15명의 청소년들은 지난 8월부터 수 차례에 걸쳐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함께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을 체험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학생부터 맹목적인 학업에 염증을 느끼고 돌파구를 갈망하다 무심코 지원한 학생까지 참가자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남윤정 양은 어린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귀국, 한국학교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경험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보청기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청력이 손상돼 심리적 위축이 심했다. 우연히 본 뮤지컬 <캐츠> 에 매료돼 뮤지컬 배우를 꿈꿨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본인도 회의하던 중 워크숍 참가의 행운을 얻었다. 캐츠>
최유진(명지외고2ㆍ휴학중) 양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특목고에 입학,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수재였지만 인생에 특별한 목표가 없다는 것 때문에 늘 고민하다 지난 3월 휴학했다. “대학을 가겠지만 가서 무슨 공부를 할 건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전혀 알 수 없는 거에요. 무작정 공부하고 대학 들어 간 뒤 생각하자는 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휴학기간 중 영화도 원 없이 보고 여행도 다녀왔다는 최양은 연극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공부를 왜 해야 하나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고 한다. “연극 대본을 보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많이 알아야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이제 제대로 공부할 차례가 됐다고 생각해요. 내년엔 복학할 거예요.”
배우가 되고 싶은데 조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고민했던 이신호(선린인터넷고1) 군은 이번 워크숍을 통해 각오를 더 단단히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7세 무렵 부모님이 집을 나가셔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려서 할아버지는 그림으로 대성하기를 바라시죠. 그런데 저는 자꾸 배우가 되고 싶어요. ‘미스터빈’처럼 희극배우가 돼서 스스로 망가지면서도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거든요. 이번 공연이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죠.”
15명의 아마추어들이 올리는 연극 <굿, 스튜던트> 는 기업의 사회환원활동의 하나로 기획됐지만 유료 공연이다. 참가 학생들이 한편의 창작물이 관객에게 선보이기 까지 전 과정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굿,>
연극은 소심한 아버지와 딸이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 십대들의 풋풋한 연애감정, 사교육 스트레스로 충돌하는 모녀, 사제간의 불신 등 10대들이 흔히 부딪치는 문제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김종석 연출가는 “아이들과 워크숍을 통해 수 차례 토론하면서 겉으로는 멀쩡한 아이들 조차 우리 사회의 속도주의나 경쟁주의에 심하게 상처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면서 “무대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처한 상황을 대범하고 슬기롭게 받아들이고 세상과 좀 더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자기 긍정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CJ문화재단은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매년 청소년 연극 워크숍을 실시한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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