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의 공기는 무겁고 낮게 깔렸다. 어둑해지는 고샅길을 난향처럼 가늘고 길게 퍼지는 술 냄새를 좇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마침내 찾아온 한 양조장.
10리에 퍼지는 술향 덕에 술집에는 문패가 필요없다더니 아무리 둘러봐도 손바닥 만한 간판 하나 없다. 마당 한쪽에 가득 들어선 술독, 소줏고리, 옹기들만이 ‘술 빚는 집’ 임을 이야기한다.
전북 정읍시 태인면의 이 양조장은 ‘죽력고(竹瀝膏)’를 빚는 술도가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 에서 평양의 감홍로, 전주의 이강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은 술이 바로 죽력고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일본군에 잡혀 몸을 상한 후 한양으로 압송되기 전 이 죽력고를 청해 먹고는 어혈을 풀고 기운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상식문답>
마당의 평상에 걸터앉아 안주인이 내주는 차 한 잔 마시며 기다리니 전주에 나갔던 송명섭(51)씨가 돌아왔다. 전국에서 유일한 죽력고 담그기 기능보유자다. 무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죽력고에 대해 물으니 안채에서 술병부터 들고 나온다. “이 술 석 잔을 마시지 않으면 죽력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다”며 잔을 따른다. 노르스름한 빛의 술은 진득하니 혀를 감싼다. 향의 진함과 맛의 묵직함은 그 어느 술보다 강했다. 32도의 높은 도수임에도 목넘김이 부드럽다.
송씨와 죽력고의 인연은 고부에서 한약방을 했던 외증조부로 올라간다. 외증조부는 치료에 도움이 될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치료보조제로 사용했다. 그 중 하나가 대나무 액(죽력)을 이용한 술 죽력고다. 이 죽력고 제조 비법은 송씨의 어머니를 통해 내려왔다.
죽력고는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3일을 불 지펴 대나무액 죽력을 얻고, 20일 걸려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다시 소줏고리에 붓고 장작불로 8시간을 가열해 죽력에 잰 댓잎에 여과시켜 소주를 내려 만든다. ‘고’는 최고급 약소주에만 붙일 수 있는 술의 극존칭이다.
송씨는 “약 기운 강한 죽력고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일정 정도 이상 취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는 사우나를 한 듯 몸속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몸이 가뿐하다”고 설명했다.
예전 술도가가 한참 잘 나갈 때는 인부를 18명이나 썼지만 지금은 단촐하게 송씨 부부만이 양조장을 꾸려나간다. 술은 추수를 끝낸 지금부터 농사일 시작되기 전인 3월까지만 빚는다. 자신의 땅에서 직접 농사지은 쌀로만 가지고 순수 전통방식으로 빚어내다 보니 1년에 생산되는 죽력고의 양은 100여 병에 불과하다. 예약을 한다 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양이다. 이곳에서 나가는 공장도 가격이 700㎖ 1병에 2만2,000원이다.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 때부터 어머니가 새끼 손가락에 찍어 입에 넣어주던 술맛을 보고 자랐다는 송씨. “쌀 7잔을 고아야 1잔의 술이 나온다. 이토록 귀한 술을 함부로 마시고 막무가내로 취해서야 되겠느냐”며 품격있는 술마시기를 당부했다. 그는 누구든지 술의 제조법을 알고자 한다면 다 알려주겠다고 했다. “최남선이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다면 조선인 모두가 즐길 수 있어야 하질 않겠나. 죽력고는 내가 처음 만든 술이 아닌 우리 민족의 술”이라는 게 그 이유다. 태인양조장 (063)534-4018
■ 옥정호 물안개 ‘환상’ 내장산 단풍 ‘황홀’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의 멋진 후렴구가 불려지는 백제가요 <정읍사> 의 고장 정읍. 드넓은 들판이 있고 국내에서 가장 화려하게 단풍이 물드는 내장산이 있고, 산중이 보석 같은 호수 옥정호를 끼고 있는 천혜의 경승지다. 정읍사>
임실군과 함께 아우르고 있는 옥정호는 섬진강 최상류의 호수다. 만경 김제 평야에 농업용수를 댈 목적으로 1960년대 초 섬진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산속에 물이 들이찼다. 옥정호 절경은 임실쪽 운암면 용운리의 국사봉에서의 조망을 최고로 친다. 새벽에 이곳에 오르면 호수 가운데 둥실 뜬 손가락 펼친 손바닥 모양의 외안날 섬 위로 아스라이 안개가 피어오른다. 정읍 관할 섬진강댐 부근의 황토리에서 보는 호수는 넉넉한 품이 아늑하다.
내장산은 전국 최고의 단풍 명소. 진입로 시작인 주차장에서부터 내장사에 이르기까지 새빨간 단풍잎이 하늘을 가리는 붉은 터널길이 이뤄진다.
이번 주 단풍 절정을 맞아 내장산 초입 제5주차장에서는 2~4일 '2007 내장산 단풍 부부사랑축제'가 열린다. 5년 만에 부활한 내장산 단풍축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밤에 보는 단풍. 단풍잎 하나하나에 조명이 켜지는 인공의 단풍나무길이 조성된다. 이 단풍나무길 곳곳에 사랑을 주제로 한 테마구역이 만들어진다. 화려한 조명이 빛을 뿜는 매직메이플라이트쇼도 가을밤 단풍놀이의 분위기를 띄운다.
낮에는 단풍잎 책갈피 만들기, 단풍잎 물들이기, 洑냄굴?보내기 등 가족 나들이객을 위한 단풍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063)532-8880
최근 정읍의 인기 관광코스는 '산외한우마을'. 비거세 숫소 고기를 값싸게 파는 곳이다. 지난해 정육점 4곳, 식당 5곳이었던 이 산골의 골목이 이제는 정육점 36곳, 식당 25곳의 거대 타운으로 커졌다.
3등급 숫소 등심 600g이 1만5,000원. 이를 정육점에서 사서 바로 옆 음식점으로 가져가 불판과 밑반찬 값으로 6,000원을 더 내고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다. 질보단 양으로 승부하는 곳이다 보니 1등급 한우의 꽃등심에 길들여진 분이라면 3등급의 질긴 소고기 맛에 실망할 수도.
옥정호수변 산내면사무소 소재지인 능교2리의 '산내매운탕'은 '맛의 고장' 정읍서도 알아주는 맛집이다. 붕어찜과 매운탕 2가지만 한다. 두충 감초 엄나무 갈근 등 한약재가 들어간 붕어찜과 매운탕은 칼칼하면서도 뒷맛이 깔끔하다. 찜 1인분에 1만원. 매운탕 대 3만원, 중 2만5,000원, 소 2만원. (063)538-4067
정읍=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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