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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4> 2세대 장인 홍성암, 국산장비 세계적 브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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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4> 2세대 장인 홍성암, 국산장비 세계적 브랜드로

입력
2007.10.3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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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길씨가 등산장비계의 장인 1세대라면 홍성암씨는 2세대다. 그는 외국산 장비가 범람하는 국내 시장에서 장비의 상품화에 성공했고 수출을 통해 한국 장비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만든 브랜드 ‘트랑고 스포츠(TRANGO Sport)’는 한국 하드기어(금속장비)의 대명사처럼 세계 시장에 알려졌다.

그는 또 암릉(岩陵)이 많은 한국 지형의 특성과, 그 암릉을 등반하는 인구가 많은데 착안해 리지(ridge)화를 만들어 리지 마니아의 호평을 받았다. 등산화 외에 하강기, 프렌드, 카라비너, 아이스 바일, 피켈, 빙벽 등반용 아이젠, 어센더, 아이스 스크루 등 암ㆍ빙벽 등반 전문장비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특히 1999년 국산 카라비너의 개발과 상품화에 성공한 것은 그의 장인정신과 등반정신이 만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산악인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알피니즘(Alpinism)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도 10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전문업체나 제조 가능한 것으로 믿었던 금속장비가 그의 손을 거쳐 개발, 생산된 것이다. 그가 만든 제품은 외국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어서, 세계 유수의 제품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그가 만든 정교한 프렌드(바위 틈에 끼어 사용하는 확보장비)는 국제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유럽과 미국의 유명 회사들로부터 하청 생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아시아권에서 가장 먼저 알피니즘을 도입하고 1920년대에 아이거에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전후 패전의 아픔을 설욕하고자 8,000m급 봉우리 중 마나슬루를 초등한 일본 조차 미국, 유럽의 수입 장비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국산장비, 뭘 믿고 쓰냐?”라는 말에 한층 더 오기를 갖고 등산장비 기능 개선에 불철주야 매달린 집념의 결과는 유럽에서 제품 심사가 가장 까다롭다는 CE(장비의 표준을 정하고 완벽한 검사를 통해 안전기준을 검사하는 기관)의 인증을 획득해 세계 시장을 상대로 대량 판매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가 CE 인증을 받은 장비는 5종 21개 품목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로 그 인증을 받은 시기에 그는 지병으로 병상에 눕는다.

어쨌든 한국의 산을 찾은 외국인들이 트랑고 제품을 사갔고, 외국의 산에서 만난 산꾼들은 그가 만든 장비를 부러워했을 정도로 그의 제품은 이름을 날렸다. 금년 3월 내가 교장으로 있는 코오롱등산학교의 강사들과 중국 쓰촨성(四川省) 쓰꾸냥의 쌍교구 빙폭 원정 등반을 갔을 때의 일이다.

유럽 빙벽 등반 장비를 사용하는 중국의 클라이머들은 이미 한국산 트랑고 바일의 명성을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가져간 제품을 실제로 보더니 기능의 우수성을 바로 매료됐다.

이탈리아의 유명 등산가 리카르도 카신, 미국의 이본 취나드가 금속장비를 제작하는 대장장이 산악인이었던 것처럼 그는 고려대 산악부 출신의 정통 산악인이다. 1979년에는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의 매킨리를 등정했다. 한국일보 후원으로 고상돈 대원이 매킨리에 올랐으나 조난으로 사망한 해이다.

85년에는 국내 빙폭 중에서 어렵기로 이름난 내설악의 대승폭 100m가 깨질 때 윤대표(코오롱등산학교 대표 강사), 정호진(코오롱등산학교 강사, 넬슨 스포츠 대표)과 함께 처녀 등반 대열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고려대가 주관한 동계 에베레스트 대원으로 원정에 참가했다.

이렇듯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자신이 만든 장비를 들고 암ㆍ빙벽 등반을 한 천상 산악인이다. 홍성암은 또 코오롱등산학교 개교 초기에 후학을 위한 교육을 담당한 우수한 자질의 강사이기도 하다.

그는 공학박사 출신으로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장비 제작에 뛰어들었다. 사업가라기보다는 장인이라는 평이 더 어울리는 그는 전문장비의 특성상 개발비가 만만치 않아 신발 판매에서 얻은 수익의 전부를 개발비에 투자했다.

하지만 국내 전문장비시장은 한계가 있어서 그는 고전을 거듭한 끝에 자금 문제에 시달린다. 그리고 나이 47세, 한창 일할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즐겨 오르던 북한산 품에 동료들의 손에 들려 한 줌의 재로 뿌려졌지만 안경 속에 숨은 그의 잔잔한 눈웃음은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다.

그가 아끼며 비기(秘技)를 전수한 후배 유학재(가셔부룸4봉 코리안루트 개척자)는 100% 트랑고 장비로 파키스탄의 트랑고를 오르려는 꿈을 갖고 트랑고의 재기를 꿈꿨지만 현실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채 둥지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선물한 트랑고 아이스 바일은 올 겨울에도 하늘과 맞닿은 빙폭에서 힘찬 날갯짓을 할 것이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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