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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0> 스트라스부르 - 유럽궁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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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0> 스트라스부르 - 유럽궁의 미로

입력
2007.10.3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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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기자들’ 참가자들은 프로그램 기간 중 취재지역을 넓은 의미의 유럽(우랄산맥 서쪽의 옛 소련과 터키를 포함한) 어디고 고를 수 있었지만, 브뤼셀과 스트라스부르 두 도시 가운데 한 곳은 반드시 가야 했다. 브뤼셀은 유럽연합 집행부가 있는 곳이고,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의회가 있는 곳이다.

둘 중 한 곳을 취재해 잡지 <유럽> 에 기사를 쓰는 것이 참가 기자들의 의무였다.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이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를 택해 1993년 2월과 3월의 본회의를 참관하며 유럽의회 의원들과 어울렸다. 내가 고른 주제는 ‘통일독일의 위험?’이었다. 생뚱맞게 들릴지는 모르나, 독일이 통일된 뒤 얼마동안, 갑자기 덩치가 커진 이 나라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유럽 여론 일각에서 일었다.

정당하든 부당하든,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주로 이 나라 책임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각인돼 있지 않은가. 나는 유럽의회 의원들이 유럽의 미래와 통일독일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천착하고 싶었다.

제가끔 다른 주제를 고른 동료 셋과 한 조가 되어, 나는 3박4일씩 두 차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렀다. 그 동료 셋은 잉글랜드 블랙풀에서 온 조애너 B, 제네바에서 온 데보라 B(브라질 친구였다. <글로부> 라는 브라질 신문의 제네바 특파원이었다), 몬트리올에서 온 제프리 H였다.

우리는 두 번 다 파리 동역(東驛)에서 새벽 5시20분 첫 기차를 타고 스트라스부르로 갔고, 두 번 다 스트라스부르역에서 멀지 않은 맹데스-프랑스호텔에 묵었다.

조애너는 데보라와 한 방을 썼고, 나는 제프리와 한 방을 썼다. 조애너와 나는 담배를 피웠고 데보라와 제프리는 피우지 않았다. 그것을 떠나서도, 세 친구 가운데 조애너가 내게 가장 편했다. 그러나 그것이 혼숙을 할 이유로 충분치는 않아 보였다.

제프리는 몬트리올 사람답게 영어와 프랑스어가 다 자유로웠고, 부모로부터 독일인의 피와 체코인의 피를 얻은 터여서 독일어와 체코어도 더듬더듬 내뱉을 줄 알았다. 그 시절 나는 늘 제프리의 유창한 프랑스어에 감탄하곤 했지만, 내 귀가 프랑스어에 한 해 정도만 익은 뒤 그를 만났더라면 웃음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표준 프랑스어에 익숙해진 귀에 몬트리올 사람들의 프랑스어는 익살스럽게 들린다. 요즘도 ‘TV5’를 통해 더러 몬트리올의 프랑스어 방송을 보게 되는 일이 있는데, 출연자들의 억양이 뭔가 넘치거나 모자란 느낌이다.

물론 몬트리올 프랑스어에 익숙해진 사람이 파리 프랑스어를 처음 들으면 그 쪽을 기괴하게 여길 것이다.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상대방 억양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과 한가지일 테지.

그러나 퀘벡 프랑스어가 프랑스어권 전체에서 놓인 자리는 미국 영어가 영어권 전체에서 놓인 비중보다 훨씬 덜 탐스러울 테니, 아무래도 런던에 온 미국 사람보다는 파리에 온 퀘벡 사람이 환경에 제 억양을 동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더 쉽게 휘둘릴 것이다.

제프리의 프랑스어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 내 귀엔 프랑스어가 다 비슷비슷하게 들렸다. 그의 모어가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이니, 어쩌면 그는 프랑스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유럽 출신 교사에게 파리 억양을 익혔을지도 모른다. 제프리는, 그 시절엔 썩 흔하지 않았던 랩탑을 들고 다니던 현대인이었다. 내겐 데스크탑도 없었는데.

■ 다리 하나 두고 독일켈市와 붙어있어

맹데스-프랑스호텔에서 유럽궁(Palais de l’Europeㆍ이 건물에 유럽의회가 있었다)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렸다. 버스를 이용하면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버스를 갈아타는 것이 번거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들은 숙소에서 유럽궁까지 걸어서 오갔다.

어느 땐 라인강 지류인 일강(이걸 강이라 해야 하나 개울이라 해야 하나?)을 죽 따라가기도 했고, 어느 땐 일강에 둘러싸인 섬 그랑드 일(‘큰 섬’이라는 뜻)을 가로질러 걷기도 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처음 갔을 땐 아직 봄이 오기 전이었는데도, 일강 가엔 더러 개구리(가 아니라 도롱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데보라가 그렇게 우겼다. 아무튼 그 비슷한 양서류)가 보였다. 그 놈들을 볼 때마다, 데보라는 “하우 큐웃!”(How cute!)을 과장되게 연발했다. 파리와 달리 차량이 많지 않아 걷기도 편했고, 독일풍의 고딕 건물들도 ‘이국 속의 이국’을 느끼게 해 좋았다. 스트라스부르는 역사적으로 프랑스령과 독일령을 오갔다. 지금도 다리 하나(이 다리 이름이, 상징적이기도!, ‘유럽 다리’다)를 두고 독일 켈(Kehl) 시와 붙어있다.

스트라스부르는 서기 842년, 샤를마뉴(카를 대제)의 손자들인 ‘독일인 루트비히’(프랑크왕국 동부지역 통치자)와 ‘대머리 샤를’(프랑크왕국 서부지역 통치자)이 제 군대들을 뒤에 세워놓고 소위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한 곳이다.

샤를마뉴의 외손자이자 이 두 형제의 외사촌이었던 프랑크왕국 궁중역사가 니타르는 이들의 서약을 라틴어와 갈로-로만어(프랑스 지역의 로만어), 고대고지독일어로 제 책에 기록해 놓았다. 그 책의 제목은 <경건한 루트비히의 세 아들 사이에 생긴 불화에 대하여> 다. ‘경건한 루트비히’는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독일인 루트비히’ 형제들의 아버지로, 프랑크왕국의 2대 임금이다.

니타르에 따르면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샤를’이 서로 상대방 지역 언어로(다시 말해 루트비히는 로만어로, 샤를은 게르만어로) 서약을 한 뒤, 양편 군사들이 제 지역 언어로 이를 따라했다 한다. 서약의 내용은 서로 상대에 대한 신의를 다짐하고, 힘을 합쳐 자신들의 맏형인 황제 로타르에게 맞선다는 것이었다.

로타르는 아우들의 동맹에 굴복했고, 이듬해 베르?窪뗀敾?통해 왕국을 공식적으로 삼분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이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탈리아 세 나라의 기원이다. 역사언어학자들은 스트라스부르 서약의 로만어 텍스트를 최초의 프랑스어 문헌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 길잃기 일쑤였던 ‘거대한 미로’ 유럽궁

유럽궁은 내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본 건축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못 생겼고(이를테면 세월의 이끼를 입은 노트르담 성당이나 로앙 추기경궁에 견줘 그것은 얼마나 꼴불견인가), 또 내가 지금껏 들어가 본 건물들 가운데 그 내부가 가장 복잡했다.

진짜 얼키설키 복잡한 건물에 들어가 볼 기회가 없어서 그리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겐 유럽궁 내부가 미로의 연속이었다. 잠시 긴장을 풀고 돌아다니다 보면, 건물 안에서 길 잃기가 예사였다. 두번째 스트라스부르 방문이 끝날 즈음에도, 나는 유럽궁의 내부 구조를 훤히 파악할 수 없었다.

유럽궁과 프레스센터를 잇는 구름다리를 찾는 데도 때로 애를 먹곤 했다. 한 가지 위안은, 유럽궁 안내원 한 사람이 이 건물의 복잡함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유럽의회 의원들은 물론이고, 유럽궁에서 꽤 오래 일한 사람들조차 더러 길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럽궁을 유럽의회 건물로 알았으나, 이 글을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뒤져보니 실은 유럽평의회(유럽연합 입법기관의 하나인 유럽연합평의회와 혼동해선 안 된다.

1949년 출범한 유럽평의회는 유럽연합과는 독립적인 조직이다) 건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유럽의회가 거기서 관례적으로 본회의를 열었을 뿐이다. 한참 뒤 일이지만, 유럽의회는 1999년 일강 건너편에 자체의 건물(이뫼블 루이즈 바이스)을 얻어 이사했다.

■ 두달간 유럽의회 참관… 의원들과 교류

당연히도, 유럽궁에는 기자가 지천이었고 정치인이 지천이었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 두 끼 중 한 끼는 정치인이 기자에게 샀다. 나는 그 밥을 얻어먹으며 바지런히 인터뷰를 (했다기보다) 땄다.

조애너와 나에게 점심을 산 정치인 가운덴 유럽의회 예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장-피에르 라파랭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는 뒷날 프랑스 총리가 되었다.

유럽의회 기자실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는 빌 클린턴의 첫번째 취임식을 지켜보았다. 그 취임식은 아버지 조지 부시의 이임식이기도 했다. 물러나는 퍼스트레이디 바버라 부시는, 남편이 아들뻘의 경쟁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줄곧 화난 표정이었다. 시종 태연한 얼굴로 더러 웃음까지 흘리는 남편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제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브라운관 속 바버라가 문득 정겨웠다. 그런 한편, 클린턴의 승리가 기뻤다. 그것은 그 때까지 미국엘 가보지 못했던 나도, 인류 누구나처럼, 제 운명의 한 자락이 그 나라 대통령에게 걸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일 테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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