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구호병원은 전주에 있던 도립병원에 임시로 설치한 병원으로 나는 그곳에서 인턴으로 1년 여를 근무한 뒤 1952년 10월 대전구호병원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 국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는 등 전세가 반전되면서 사회는 폐허 속에서나마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구호병원을 찾아왔다. 그리고 입원한 가족과 눈물의 상봉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구호병원은 오늘날 이산가족상봉센터와 같은 역할도 했던 것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53년 전국에 15개의 보건소와 수백 개의 보건진료소가 설치됐다. 미군정 하에서 처음 세운 서울시립보건소가 전쟁 중 파괴되는 등 의료시설이 부족해지자 전쟁 후 유엔의 지원으로 구호와 보건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보건소, 보건진료소를 설치한 것이다.
이때 대전구호병원은 대전시보건소가 됐고 56년 보건소법이 제정되면서 체계적인 운영이 시작됐다. 나는 대전시보건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를 책임졌다. 대전시보건소는 대전시 은행동에 있었는데 유엔 지원 하에 미국식 예방의학제도를 도입해 예방접종, 모자보건,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주사업으로 했다.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나는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을 했다. 신부는 연세의대 동기생인 김종원의 누이동생으로 54년 5월 1일 천안의 어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인이 용산철도국에서 대전철도국으로 전근했다가 다시 천안으로 발령났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몇 해 동안 대전에서 살았다. 신혼생활은 가마니로 바람막이를 한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사과상자를 책상이나 찬장으로 쓸 정도로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될 무렵인 56년 미국 병원에서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전쟁 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당시 대부분의 국민은 구호 차원의 의료 서비스만 받고 있었는데 대전시보건소에서 미국식 예방 의학을 처음으로 접한 나는 본격적으로 선진 의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을 가려면 먼저 정부의 해외유학 자격시험을 치러야 했다. 친구들과 함께 토니 박사라는 선교사로부터 영어 교습을 받았다. 그는 지체부자유자를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분으로 그 덕분에 외무부 영어시험에 쉽게 합격했고, 마침내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의 인턴 초청을 받을 수 있었다.
56년 6월 말, 나는 인천항에서 아내, 세 살 배기 어린 딸의 환송을 받으며 유학길에 올랐다. 수도의대(현 고려대 의대)출신으로 산부인과 교수가 된 홍승범, 정형외과 교수가 된 서광윤을 비롯해 전남의대 출신 등 일행은 모두 7명이었다.
한국에서 뉴욕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후 미국 서부에서 기차로 횡단해 동부로 가야 했다.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미군 수송선을 탔다. 한국으로 미군을 실어오던 배로 인천항을 떠난 지 15일 만에 캘리포니아주 서남부 롱비치항에 도착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감할 정도로 긴 여행이었다. 전후 복구과정에 있던 서울이 차도 별로 없고 전기도 시간제 배전이어서 밤이면 암흑 세계였던 데 반해 롱비치의 밤 거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상점의 불빛이 명멸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롱비치에서 하루를 보내고 각자 행선지로 흩어졌다. 나는 서광윤 선생과 함께 기차로 뉴욕까지 갔다. 식사는 햄버거와 핫도그로 때우며 광활한 미 대륙을 3박4일 동안 횡단했다. 넓은 땅은 농작물도 심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고, 석탄도 우리나라처럼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표면에 드러나 있었다.
베개 베고 담요 덮고 자면서 가는 쾌적한 침대 열차는, 성한 유리창 하나 없던 우리의 피난열차와 사뭇 달랐다. 드디어 종착역인 맨해튼 42번가 그랜드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중앙청, 조선호텔, 화신백화점 등을 큰 건물로 보아온 나는 하늘을 찌를 듯 건물이 솟아있는 세계 제1의 도시 뉴욕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가방을 간신히 끌어 택시를 타고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을 찾아갔다.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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