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명분을 세우는 일은 전쟁보다 힘들다. 그래서 전쟁 합리화를 위해 온갖 궤변과 거짓이 진실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둔 2003년 1월에 쓴 칼럼 <석유를 위한 전쟁> 의 첫 머리다. 당시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이라크 민주화를 전쟁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세계 곳곳에서 'No War for Oil'을 외치는 반전시위가 물결 쳤다. 이라크 침공이 석유자원을 노린 제국주의적 전쟁임을 쉽사리 간파한 것이다. 석유를>
● 얄팍한 파병 연장 찬반 논리
미국의 전쟁 명분은 남김없이 무너졌다. 대량살상무기는 흔적도 없었고, 이라크 안정과 민주화도 요원하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너덜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 깃발을 힘겹게 치켜들고 있으나, 전쟁 수행에 이바지한 고위급 인사들이 '전쟁의 진실'을 망설임 없이 토로하고 있다.
미 중부사령관으로 전쟁을 이끈 존 아비자이드는 최근 "석유를 위한 전쟁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비 부담에 허덕인 경제를 추스른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회고록에서 "다 알듯이 석유를 위한 전쟁임을 인정하기가 정치적으로 불편한 것이 서글프다"고 털어놓았다.
전쟁의 명분과 진실을 새삼 살핀 것은 자이툰 부대의 파병 연장을 놓고 찬반을 다툰 대통령 후보들의 논리와 어법이 한심해서다. 파병을 단행한 대통령이 '이라크 평화와 재건 지원'이라는 공허한 명분을 슬며시 내려놓고 '한미 공조와 국익'을 강조한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겨 진정 송구하다는 듯 표정을 꾸밀 수 밖에 없는 처지인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파병 연장에 찬성하면서 "자이툰 주둔지는 기름바다 위에 있다"고 말한 것은 듣기 민망하다. 미래 자원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지만, 국제무대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노릇을 자임한 이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다.
정부나 기업의 은밀한 전략회의라면 모를까, 내놓고 '기름' 운운하며 파병 당위성을 논하는 외국 지도자는 없다. '석유를 위한 전쟁' '자원전쟁' 등은 흔히 위선적 전쟁 명분을 비웃을 때 쓴다.
이 후보가 자랑하는 실용적 접근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혼미한 정세 속에 미국 서유럽 중국 이란 등이 치열하게 석유이권을 다투는 마당에 우리 몫이 있을지 의문이다.
자이툰이 주둔한 쿠르드 지역 자치정부는 지난 달 텍사스 헌트 오일에 석유개발 이권을 주었다. 헌트 오일은 부시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레이 헌트 소유다. 막연히 '기름바다'에 욕심 내는 것은 어리석다.
특히 쿠르드 지역은 인접 터키와 분쟁 위험이 높은데다, 미국 이스라엘 이란 등의 전략적 다툼과 공작 활동이 치열하다. 확고한 목표와 전략 없이 마냥 머물 곳이 아니다.
그러나 정동영 후보가 "한국군이 세계의 용병 공급원이 돼도 좋다는 것이냐"고 흥분한 것은 한층 비극적이다. 그는 2004년부터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 안보통일 정책을 총괄했고, 2005년 2월에는 자이툰 부대를 '깜짝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는 셔츠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이역만리에서 평화와 재건 지원 활동을 하는 여러분을 보니 감개무량하고 조국애의 실체를 본다"고 장병들을 한껏 칭송했다.
"이라크가 안정되면 우리 기업 진출에 발판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랬던 이가 무슨 변덕 또는 조화인지 갑자기 자이툰을 용병으로 규정하고 나선 것이다.
● 대권 후보들 인식수준 서글퍼
대권 경쟁에 몰두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내뱉은 실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모욕한 것은 군이 아니라 정 후보 자신이다. 아무리 보수와 진보의 차별화가 급하더라도, 스스로 노인성 치매 수준의 건망증을 서슴없이 드러낸 것을 달리 평가하기 어렵다.
정치적 소신의 일관성이나 정직성 따위를 굳이 논할 것도 없다. 다만 무엇보다 중대한 국가 전략과 국익이 걸린 파병 문제에 고작 이 정도 인식과 논리를 지닌 대통령 후보들을 지켜보는 게 서글프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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