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서귀동에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살던 집이 남아 있다. 1951년 초 전쟁에 쫓겨 일본인 부인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다섯 살(태현), 세 살(태성) 난 두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간 이중섭이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1년여 살던 곳이다.
몇 년 전 그곳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이중섭 네 가족이 세들어 산 초가집의 단칸방은 1.4평, 사내 하나가 드러누우면 그대로 꽉 차버릴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이중섭은 두 아들과 이 언덕 위의 초가집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 게를 잡고 조개와 해초를 캐서 연명했다. 게와 물고기와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중섭의 작품은 이 시절을 그린 것이다. 그 초가집 옆에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세워졌다.
미술관에 전시됐던 이중섭의 은지화, 화구를 살 수 없었던 그가 심지어 피난지 부산의 변소에 버려졌던 양담뱃갑의 은박지까지 모아 주머니칼로 새겨 그린 그림을 보며, 그의 고단했던 삶에 가슴이 아려오던 기억이 난다.
이중섭이 개인전을 연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다. 1952년 12월 일본으로 떠난 부인과 두 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여비 마련을 목적으로 1955년 1월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연 '이중섭 작품전'에 그는 4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하지만 이중섭은 자신의 이 전시회에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싸구려 도료 페인트를 섞어 그림을 그렸고, 몇 달씩 대상을 관찰하며 그림을 완성하던 작업태도를 버리고 시간에 쫓겨 그려치웠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개인전 이후 중섭은 예술적 자학 증세를 보였다.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여관 부엌 아궁이에 자기 그림을 가짜라며 태워버렸다.
"예술을 한답시고 세상을 속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나이 마흔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숨졌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이나 무연고자로 분류된 채 방치돼 있었다.
2년 6개월을 끌어오던 이중섭과 박수근(1914~1965)의 그림 위작 소동이 지난 주 검찰 수사 끝에 사기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미술판의 위작이야 항용 있어왔고 또 생겨날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번 소동은 무려 2,827점이나 되는 그림을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두 화가의 작품으로 속이려 했던 어이없는 사기성, 대부분 한눈에 봐도 습작 수준도 못되는 가짜들을 놓고 경매업체 화랑 감정단체 등 온 미술계가 휘둘렸던 것, 그리고 수사결과 발표대로라면 이중섭의 아들 이태성씨가 위작의 일부분을 진품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 관여했다는 점 때문에 놀랍고 또 안타깝다.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는 이번 사건에서 이태성씨와 정반대편에 섰다. 호주로 이민 가 20년 넘게 살던 그는 아버지 박수근의 작품이라는 그림 200여점이 갑자기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진실을 밝힐 작정으로 아예 귀국했다.
박성남씨와 인사동 주점에서 너댓 차례 합석한 일이 있다. 그는 "그런 조악한 그림들이 아버지의 작품일 수가 없다"면서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며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에도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림 한 점이 45억2,000만원으로 근현대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또 경신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어느날인가, 그는 "그림값이 문제가 아닙니다.
박수근이 자신의 시대에 뭘 그리려 했는지가 중요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태워버린 이중섭의 예술혼, 한국의 정서를 그린 박수근의 마티에르는 돈을 노린 위작 따위로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정신'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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