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강남지역의 한 허름한 건물 3층에 있는 A어학원 복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교실 안 영어강사의 설명만 이따금 새어 나올 정도였다. 한 수강생은 이곳을 ‘고시원’이라고 불렀다. 고시 공부하듯 영어 책을 달달 외우다 보면 언젠가 자신들도 토플 고득점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한 강의실에는 ‘독사반’이라는 살벌한 이름도 붙어 있었다. 학원 관계자는 “수강생들이 공부를 독하게 하자는 의미에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영어 강박증이 ‘스파르타 영어학원’까지 만들어 냈다. 하루 종일 학원에 갇히고, 혼나고 맞아서라도 각종 영어평가시험 점수를 올려 보겠다는 어른들로 학원은 북적이고 있다. 학원 관계자는 “평소에는 직장인과 대학생이 주로 오지만 방학 때는 지방 학생과 중고생들까지 몰려 1달 평균 200~300명이 온다”면서 “면접을 보고 테스트를 해서 수강생을 뽑는다”고 말했다.
“3일도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이 많다.” 최근 상담 차 이 학원을 찾은 K(31)씨는 학원 관계자로부터 엄포부터 들었다고 했다. K씨는 직장을 그만 두고 내년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에 입학할 계획이지만 토플 점수가 모자랐다. K씨는 ‘세게’ 가르친다는 학원을 골랐고, 상담 강사는 K씨의 기대대로 “각오 단단히 하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영어 시험 고득점이 다급한 만큼 수강생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엄격한 생활규칙은 물론 체벌이나 벌금까지 감수한다.
실제로 학원에 들어오려는 수강생은 ‘단 한 번만 무단결석해도 제적’, ‘실내화 신고 외출 금지’, ‘다른 수강생을 술 마시자고 꼬드기거나 동조하면 제적’ 등을 서약해야 한다.
수업 태도가 불량하거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심지어 손바닥으로 등을 맞는 봉변을 당할 때도 있다. 최근 학원을 그만 둔 A(26)씨는 “어떤 강사는 시험에서 틀린 문제 수만큼 손으로 수강생의 등을 때리기도 했다”며 “이 나이에 맞으면서까지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부 수강생은 밥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을 빼곤 하루 13시간을 꼼짝달싹하지 않고 영어에 매달리고 있다. 오전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자습이 이어진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집에 돌아 가도 ‘단어 200개 외워오기’ 등 산더미 같은 숙제를 하다 보면 새벽 2, 3시를 넘기기 일쑤다. 최근 상담을 받은 G(21)씨는 “어떤 학생은 너무 무리해 공부하다 링거를 꼽고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들었다”라며 “학원 측도 ‘쓰러질 정도로 열심히 해야 점수가 오른다’고 독려한다”고 전했다.
단어 시험이나 받아쓰기 시험 등을 못 보면 하루 최고 5,000원의 벌금을 낸다. A씨는 “3주 동안 벌금만 16만원을 낼 뻔했다”고 말했다.
다 큰 어른들이 수모를 자청하면서 제 발로 학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유학 외에 국내 취업, 승진에도 빠짐 없이 영어자격시험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C(23ㆍ여)씨는 “어떻게 해서든 고득점을 받아야 하는 마당에 누가 다그쳐 줘서라도 점수가 올라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연세대 조한혜정(사회학) 교수는 이처럼 현대인들이 영어에 집착하는 현상에 대해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혹시 도태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돈과 시간을 다 쏟아 부어서라도 누가 공부를 시켜주면 그 시간 만큼은 덜 불안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김혜경인턴기자 (이화여대 국문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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