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조각해 놓고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면 그 스스로 형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내게 늘 스승 같은 존재죠.”
나무가 아니면 안 되었다. 무언으로 수 천년을 견뎌온 거대한 나무의 몸에서 찬란한 나무의 언어를 추출해온 그의 작품들은 질료의 대체 불가능성으로 창연하다. 칼집을 내도, 색을 칠해도, 불에 태워도, 나무들은 수종에 따라 저마다의 언어로 각기 다르게 응답한다. 그것은 모두 나무의 뜻이므로, 그는 나무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가만히 그 뜻을 좇는다.
영국 왕립학술원 회원인 나무조각가 데이비드 내시(62)의 개인전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수평과 빗금의 칼집으로 홈을 파놓은 키 큰 나무조각들을 비롯해 나무를 모닥불에 던져넣어 새카맣게 태운 조각들, 속살이 빨간 주목을 불에 그을려 적과 흑을 대비시킨 작품 등 최근 2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온 근작 40여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에 깊게 칼집을 내놓으면 수분이 마르면서 틈이 벌어지는데, 수종에 따라 그 변화가 천차만별입니다. 떡갈나무는 거칠어서 칼이 잘 안들어가고, 라임나무는 부드러워서 조각하기가 쉽죠.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자작나무 모두 다 달라요.”
관람객을 향해 절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언 크로스 에그(Iron Cross Egg)’를 지나 1층 전시장의 큰 방으로 들어가면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들이 놓여있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사이프러스 나무로 피라미드, 구, 육면체를 조각한 후 깊게 판 홈만 검게 그을리고, 그때 생긴 숯으로 그린 드로잉을 조각 뒤에 그림자처럼 놓은 것.(‘Incised Pyramid, Sphere, Cube’, 2000년).
“자연의 모든 형상은 원뿔과 구, 원통으로 환원된다는 세잔의 말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몸으로 읽는 입체와 눈으로 읽는 그림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 만족스럽죠.”
그의 작품들은 나무조각을 이어 붙이는 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나무에서 형상을 끄집어내는 ‘원피스 방식’이라 작품의 크기를 구현할 수 있는 나무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1,500살 된 주목까지 사용해봤지만, 한번도 작업을 위해 살아있는 나무를 벤 적은 없어요. 지금은 이름이 알려지면서 세계 각지에서 나무를 선물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처음엔 제가 살고 있는 북웨일즈 주변의 공터나 개간지에서 베어지는 나무들을 얻어다 작업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가장 큰 문제인데, 그 당시 재료값이 없었거든요.” 그는 비평가들은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본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이 탄생시키는 거라고 강조했다.
재미난 일화도 많다. “한번은 일본에서 350년 된 감나무를 베어가라는 연락이 온 적이 있었어요. 매년 감이 열릴 때마다 원숭이들이 몰려와 감을 따먹는데, 감이 워낙 맛이 없어서 원숭이들이 먹던 감을 이웃 주민들의 집으로 집어 던져 매년 동네 분란이 벌어졌던 거예요.” 350년간 반복돼온 주민 민원을 그는 단숨에 해결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1978년부터 무려 25년간 촬영한 비디오 작품도 선보인다. 태풍에 쓰러진 산중턱의 떡갈나무를 커다란 바위 모양으로 조각해 이 ‘나무바위’가 계곡을 거쳐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향해 가다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사반세기 동안 지켜보며 만든 대작이다. 전시는 다음달 26일까지. (02)735-8449.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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