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의 시대는 끝났다.’
알폰소 사모라와의 리턴매치에서도 타이틀 탈환에 실패하자 당시 언론과 주변의 눈초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위로의 말이나 재기를 위한 독려 같은 것은 없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안방에서 유치한 타이틀전임에도 주심 선정권을 계약 당시 모두 챔피언측에 맡겨 사모라의 모국인 멕시코인에게 주심을 맡겼고 결국 석연치 않은 TKO패를 당했다. 챔피언측의 요구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도전자의 핸디캡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시 언론은 한 술 더 떴다. ‘막내린 홍수환 시대’라는 표현은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Broken English’라고 한 것은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다. 당시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를 몇 마디 외친 것을 꼴사납다 하여 비웃은 것이다.
패배를 질타하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며 힐난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서 줄곧 살던 복싱선수가 어설픈 영어를 했다 해서 비아냥대는 것은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덕분에 나는 더 적극적으로 영어공부를 했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어 영어는 내 ‘제2의 언어’가 되었지만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씁쓸하기만 하다.
당시 주심의 판정에 치를 떨며 주변의 비아냥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주심의 판정이나 불운을 떠나 내 기량이 진정한 챔피언이 될 기량이었다면 그 링 위에서 사모라를 압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내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얻어 맞은 것만 봐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패배는 깨끗이 인정할 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다. 그리고 패배는 분별과 집중을 가져 다 준다. 그것은 인간을 좀 더 고상하게 하며 강하게 해준다”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아동복 장사를 하는 친누나(홍수민)를 만나러 갔다. 파이터 머니를 얻기 위해서다. 그 누나는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서 여전히 옷 가게를 하고 있다.
가게로 가는 내리막 길에서 나를 알아보는 두 명의 여인을 만났다. 그 중 한 여인이 내 손을 잡고 “한 번만 더 하세요. 꼭 한 번 만이요”라고 애원했다. 나는 하늘이 준 운명적인 계시라 생각했고 재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누나에게 당시 30만원을 빼앗아 오다시피 해 얼마 후인 1977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필리핀 출신의 콘라도 바스케스와 재기전을 치렀다.
1976년 10월 16일 사모라전 패배 이후 5개월 만의 경기였다. 상대에 대해서는 나와 동양 타이틀을 놓고 겨뤘던 태국의 벙어리 복서 수코타이와의 원정시합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것 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재기전은 복서에게 있어 가장 압박 받는 시합중의 하나이자 선수생명의 마지노선과 다름없는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나는 상대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그 동안 사모라에게 패한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빠지면서 치는 레프트를 익혀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었고 시합은 예상외로 쉽게 풀려나갔다. 4라운드에는 다운까지 빼앗아 한층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10회 판정승을 거뒀다. 사모라와의 패배 이후 절망감에 빠졌던 나로서는 다시 재기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 경기였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패배는 사람의 보다 강인한 용기를 얻어 내기 위한 백신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릇 패배란 것은 부러지는 유형과 구부러지는 유형이 있다고 한다. 부러지는 것은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구실이나 의지마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부러짐의 패배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뜻한다. 마치 대나무처럼 휘어졌을 뿐 다시 꼿꼿이 일어설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의 패배다. 이는 승리와 패배는 모두 우리들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모라전의 패배는 나에게 있어 단지 구부러졌을 뿐, 챔피언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끝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곧 4전5기 신화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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