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밤 프로축구 K리그에서 오랜 앙숙으로 유명한 대전 시티즌과 수원 삼성의 서포터 40여명이 대전 월드컵경기장 인근의 한 음식점에 둘러 앉았다. 양측은 경기장에서 여러 차례 물리적 충돌을 빚어 온 사이라 한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의아했다.
이날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대전 김호 감독. 자신의 생일(18일) 잔치에 대전의 열성 서포터들과 수원 감독 시절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수원 서포터들을 초대한 것이다.
김 감독은 "축구를 사랑하는 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응원하는 팀이 다르다고 서로 부딪히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양쪽 서포터들은 삼겹살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가며, 소주에 취해 가며 K리그의 전설과 희망을 밤늦도록 얘기했다.
생일 잔치는 참가한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덕담하면서 함께 녹아 들 수 있는 자리다. 평소 사이가 나쁜 사람들도 조금은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웃는 낯으로 마주하기 때문에 갈등이 완화(완전 해소는 아니지만)된다.
생일 잔치가 갖는 이런 화합 지향적 성격 때문에 조선 임금들은 자신의 생일에 서로 대립하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김 감독의 생일 잔치도 다퉈 왔던 양측 서포터들에게 작은 화합의 자리가 됐다는 점에서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정반대로 한 생일 잔치에서 분탕질을 했다. 그는 19일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특정 집단의 독주 체제가 조성되는 것은 경찰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 발언을 경찰대 출신 간부들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8월 말 경찰대 1기인 황운하 총경 사태 당시 경찰대 출신에 대해 가졌던 불만을 이번에 마구 쏟아 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경찰대 출신 비판은 결과적으로 경찰대 출신과 비경찰대 출신의 분열을 조장하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화합의 덕담'이 필요한 경찰의 생일 잔치에서 해야 할 발언은 아니었다.
물론 경찰대 출신이 너무 잘 나가 비경찰대 출신과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다른 분야의 주류와 비주류 간 대립 양상을 보면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남의 생일 잔칫상을 뒤엎을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황 총경 사태를 '독주하는 경찰대 출신들의 작당'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대 출신이 잘 나가는 것과 황 총경 파동은 상관 관계가 상당히 떨어지는데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택순 경찰청장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보복 폭행 사건 수사 과정에서 나타낸 모호한 태도는 경찰대 출신뿐 아니라 대다수 경찰관에게 문제로 비쳐졌고, 결국 이 청장 사퇴 요구로 번졌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를 하극상이라고 매도하고 경찰청은 사태를 주도한 황 총경에게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당연히 황 총경 동정론과 징계 철회 여론이 비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런 자초지종은 깨끗이 덮어 버리고 이 사태를 경찰대 출신의 집단행동으로 몰아갔다. '모든 잘못은 잘 나가는 자들에게 있다'는 평소 노 대통령의 소신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 감독이 생일 잔치에서 보여 준 리더십을 노 대통령도 배워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일인 것 같으니 대선후보들이라도 한 번 눈여겨 봤으면 좋겠다.
이은호 정치부 차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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