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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충무공의 명량대첩과 'NLL 수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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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충무공의 명량대첩과 'NLL 수호' 의미

입력
2007.10.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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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은 역사적 사건이 겹친 뜻 깊은 날이다. 28년 전인 1979년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돼 유신이 막 내린 날이다.

87년 전인 1920년 이날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군 등 2,0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아즈마 마사히코 소장이 지휘한 일본군 2개 연대 5,000여 명을 두만강 상류 청산리 일대에서 철저히 섬멸한 청산리전투가 끝난 날이다.

98년 전인 1909년 이날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날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그래도 침략의 마수를 거두지 않고 그 이듬해 8월 29일 우리나라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했으니 이날이 곧 국치일이다.

또한 410년 전인 1597년 이날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날이다. 선조 30년(1597) 음력 9월 16일,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의 명량해협에서는 조선왕조의 운명을 가름할 바다의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왜군이 133척의 대함대인 반면 조선군의 판옥선은 겨우 13척. 왜군의 뒤쪽에는 200여 척의 함대가 이 해전에서 승리하면 서해로 북상하고자 대기하고 있었다.

● 리더십·희생정신 되새겨야

조선 수군은 불과 2개월 전 원균을 총수로 한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겁 먹고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이 해전을 하루 앞두고 장령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도 당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우리의 형세가 이와 같다. 제장이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율대로 시행할 것이니 작은 잘못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악전고투 끝에 적의 대장선을 비롯해 왜함 31척을 격파하니 나머지는 먼 바다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 기적 같은 대첩으로 정유재란은 새 전기를 마련했다. 남해에서 서해로 북상해 서울을 포위하려던 왜군의 기도가 여지없이 깨져버렸고 조선 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무적함대로 거듭나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세계해전사상 전무한 불멸의 승리 명량대첩을 맞아 다시 한번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의 안정뿐 아니라 안보도 우려스러운 요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불거진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가 그렇다. NLL은 누구의 말처럼 비록 문서로 기록된 영토는 아니지만 우리 해군이 1953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목숨 바쳐 지키고 있는 영토 개념의 바다의 수호선이다. 그런 까닭에 불세출의 리더십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이순신정신의 재조명이 절실한 것이다.

● 지도자의 자세가 명운 갈라

조선왕조는 미증유의 재앙인 임진왜란으로 망국의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결과 불과 40년 만에 병자호란을 당했고, 다시 300년 뒤에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국가지도자가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외면한 채 내분이나 조장하다 보면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나라가 망한다는 교훈을 절감해야 한다. 10월 26일, 이날은 다시 한 번 역사의 뼈저린 교훈을 되새겨야 할 뜻 깊은 날이다.

<저작권자>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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