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는 압록강으로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한반도의 북쪽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 수계로 획정한 백두산 정계비(숙종 38년ㆍ1712)는 비가 세워진 18세기 이래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의 키워드는 '토문(土門)' 이다.
<강계고(疆界考)> 의 저자 신경준을 비롯해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정계비상의 '土門'은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의미한다며 국토상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명했고 현재까지 많은 학자와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논리로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강계고(疆界考)>
이강원 전북대 교수(지리학)는 23일 정신문화연구 가을호에 기고한 논문 <조선후기 국경인식에 있어 두만강, 토문강, 분계강 개념과 그에 대한 검토> 에서 이는 지리적 사실과 역사적 상상을 혼돈한 오해의 산물이라며 두만강 대안(對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후기>
논문에 따르면 이같은 혼란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만주어 지식부족과 정계비를 세운 청의 사신인 목극등(穆克登)의 부정확한 지리적 정보가 결합된 결과다. <용비어천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조선초기 관료들은 현재 두만강을 의미하는 만주어 두만(頭滿)은 ‘투먼tumen’으로, 구멍(穴)을 의미하는 만주어의 보통명사인 토문(土門)은 ‘투문tumon’으로 구분해 표기했다. 용비어천가>
그러나 중국어의 음운적 한계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두 가지 의미의 단어는 모두 ‘투먼tumen’으로 수렴됐고 이후 구별없이 ‘徒門, 土門, 圖門 , 圖們’ 등의 표기로 정착됐다.
중국어와 만주어에 모두 능했던 목극등은 정계비에 ‘土門’라고 기록하면서 이를 두만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이자 구멍(穴)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함께 인식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추론이다.
부정확한 지리정보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목극등은 천지의 물이 땅속(穴)으로 스며들어 복류(伏流)하다가 동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곳에서 두만강이 된다고 생각해 이를 ‘土門’으로 표시했다는 것. 그러나 동쪽인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생각했던 이 물줄기는 현재 흑석구(黑石溝)ㆍ흑석하(黑石河)로 불리는 송화강으로 흘렀다.
만주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신경준, 서명응, 성해응 등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은 목극등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송화강의 지류를 단순히 ‘土門’ 으로 이해함으로써 국토상실의식을 키웠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tumen의 이중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들, 19세기 중반이후부터 간도의 생활터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조선이민자들의 논리가 결합돼 간토영토권의 주장이 나오게 됐다” 며 “조선후기의 논리에 입각해 간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은 지리적 사실과 역사적 상상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인문사회학부)는 “송화강의 지류를 두만강으로 착각한 중국측에 지리적 착각의 책임이 귀속돼야 한다”며 “백두산 영유권 분쟁과도 관련 있는 문제이므로 문헌적 논증 뿐 아니라 실증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이 같은 주장을 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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