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항구도시 디에프엘 가본 게 대여섯 번쯤 되는 것 같다. 죄다 당일치기 나들이였다. 그리고 죄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씨와 함께였다. 실은, 홍세화씨와 함께 갔다기보다 홍세화씨를 따라간 것이다.
1992년 9월 내가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내 아내와 나를 데리고 디에프로 갔다. 그리고 그 뒤 한 해에 한 차례 정도 나를 그 바닷가로 이끌었다. 서울 사람들이 손쉽게 바다를 보고 싶을 때 인천으로 가듯, 파리의 홍세화씨는 바다를 보고 싶을 때 디에프로 갔다. 거기서 영국해협의 물결에 발을 적셨다. 그와 함께 발을 담그며, 나는 문득 바다 건너 영국을 생각하곤 했다.
유럽에 다섯 해 정도 살았지만, 나는 영국해협을 한 번도 건너지 못했다. 파리 북역에서 유로스타를 타면 두 시간 만에 런던 워털루역에 닿을 수 있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억을 곧이곧대로 떠올리자면 돈이 겁나서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상 속의 영국이 나를 매혹했다면, 나는 살림살이에 다소 압박을 주고서라도 그 나라에 가봤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영국은 나를 호리지 못했다.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가봐도 썩 아쉬울 것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둘째 매제가 직장에서 안식년을 얻어 누이 식구가 런던에 1년 살고 있을 때도, 아내와 나는 영국해협을 건너지 않았다. 방학 동안 아이들 둘만 런던으로 보내 열흘 남짓 있다 오게 했을 따름이다.
나는 도버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쪽 도시 칼레에도 가보지 못했다. 내가 영국에 가장 가까이 간 것은 디에프까지였다. 이 노르망디 도시는 루마니아 출신의 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이 제 모국어를 버린 곳이다.
시오랑은 30대의 어느 날, 디에프의 한 여관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다가, ‘아무도 읽어줄 것 같지 않은’ 제 모국어에 심통이 나 그 뒤론 프랑스어로만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디에프는 또 아스날이나 첼시 같은 잉글랜드 프로팀에서 활약한 축구선수 에마뉘엘 프티의 고향이기도 하다.
■ 백년전쟁 전 수세기 동안 잉글랜드 영토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노르만왕조를 수립한 1066년 이래 여러 세기 동안, 노르망디는 잉글랜드 영토였다. 프랑스 왕가가 노르망디 대부분을 되찾은 것은 백년전쟁을 통해서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대륙의 영토를 거의 다 잃은 뒤에도, 두 나라 왕실이나 지배계급 사이의 인연은 끈질기게 계속됐다.
본디 유럽 왕가들은 거미줄 같은 친인척 관계로 이어져 있는 터라 크게 보면 다 한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툭 하면 왕위계승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다.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 아래서, 누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왕위계승의 그리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고귀한 핏줄이었다. 그래서 국경을 넘나드는 왕족끼리의 정략 결혼이 흔했고, 그러다 보니 제 신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군주도 여럿 나왔다. 특히 잉글랜드의 경우엔, 노르만 정복 이후의 국왕들이 대체로 프랑스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노르만왕조만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플랜태저넷왕조, 랭커스터왕조, 요크왕조, 튜더왕조, 스튜어트왕조가 죄다 그렇다. 근대 초기까지 잉글랜드 왕들(과 적잖은 스코틀랜드 왕들)에겐, 프랑스가 바다 건너 외국이면서 고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엔 사료가 소략해 단언할 순 없지만, 고대 일본 천황가와 지배계급이 한반도 남부를 보는 눈도 이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이 곳이 제 뿌리였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고, 한반도 정치에 군사적 외교적으로 개입하고 싶은 욕망이 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매우 위험해 보이는 상상이다.
‘잃어버린 영토’라는 표현이 특히 그렇다. 독자들은 이 표현에서 대뜸 임나일본부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소위 임나일본부설이라는 것에 근거가 있다고 해도, 그게 굳이 신경을 곤두세울 일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이 까마득히 오래 전 일이어서만은 아니다. 설령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부가 일본 영토였고 그것이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영토에 견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일본에 한국계 지배계급-정복왕조가 들어섰다는 뜻이지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뜻은 아니니 말이다.
디에프를 오가는 길에, 홍세화씨는 더러 차를 세우고 나와 함께 내려 리처드1세(사자왕 리처드)의 전설이 얽혀있다는 유적들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다.
눈썰미도 없는 데다 건성건성 들어서 그 세부는 기억나지 않지만, 프랑스 땅에서 잉글랜드 왕의 흔적을 보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리처드1세는 남의 영토에 제 흔적을 남긴 게 아니라 제 영岳?제 흔적을 남긴 것이다.
제3차 십자군전쟁 때 예루살렘 전투에서 이슬람 군주 살라흐 앗딘(살라딘)과 겨룬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1세는 플랜태저넷왕조의 두 번째 왕이다. 그의 아우 존 왕은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함으로써 자신에겐 치욕을 안기고 잉글랜드 헌정사에는 명예를 안겼다. 플랜태저넷왕조는 프랑스 앙주 가문 출신이어서 앙주 왕조라고도 한다.
디에프는 프랑스를 떠나 꿈을 찾는 사람들의 출항지였다. ‘누벨(新)프랑스’라고 불리게 될 북아메리카 식민지(캐나다, 아카디아, 허드슨만, 뉴펀들랜드, 루이지아나 다섯 행정구역으로 이뤄진)를 개척하기 위해 진취적인 프랑스인들은 이 곳에서 돛을 올렸다. 루이14세의 퐁텐블로 칙령으로 믿음의 자유를 잃게 되자, 위그노(프랑스 신교파)들 역시 이 곳에서 더 너그러운 사회로 탈출했다.
■ 캐나다軍이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켜줘
캐나다로 가기로 결심한 16~17세기 프랑스인들이 디에프에서 돛을 올린 것에 화답이라도 하듯, 20세기에는 캐나다인들이 디에프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상륙은 매우 비극적인 상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19일, 대부분 캐나다군이었던 연합군 보병 6,000여 명이 영국 해군과 연합군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디에프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단기적으로라도 독일 점령지의 주요 항구를 장악해 독일군 전력을 시험해보겠다는 게 목적이었다.
주빌리(기쁨) 작전이라 불렸던 이 기습에서 기쁨을 맛본 것은 독일군이었다. 상륙한 캐나다군 반 이상이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었고, 연합군 비행기 119대가 격추됐다. 영국 해군도 6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육해공 어느 쪽에서든, 아직 연합군은 독일군의 상대가 안 되었다.
디에프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뒤 두 해가 더 필요했다. 1944년 9월1일 이 도시를 마침내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것도 캐나다군이었다.
디에프성(城) 근처에 캐나다공원이 들어서고, 그 곳 기념비 위에 삼색기와 단풍잎기(캐나다 국기)가 함께 펄럭이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 기념비에는 “누 누 수브농”(우리는 기억합니다)이라는 문장이 박혀 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캐나다의 뉴브룬스위크주는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의 소도시 레제 코르네르를 디에프로 개칭했다. 디에프에서 죽은 캐나다 군인들을 추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세기부터 치자면, 디에프와 캐나다의 관계는 500년 가까이 이어져온 셈이다.
■ 깎아지른 듯한 흰빛 낭떠러지 ‘장관’
디에프 해안은 깎아지른 듯 높다랗게 서 있는 흰빛 낭떠러지들로 유명하다. 그런데 바다 건너 도버에도 그런 백악(白堊)의 해식애(海蝕崖)가 늘어서 있다 한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리튼섬 침공의 거점으로 도버를 골랐다. 카이사르가 거기서 처음 본 것이 그 흰빛 단애들이었으니, 그가 이 섬을 알비온(하얀 땅)이라 부른 것도 그럴싸하다.
실은 지금의 영국 땅을 이 비슷한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 이전부터고, 그 이름은 켈트어 어원으로 ‘땅’이나 ‘세계’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로마인들은 대뜸 그것을 제 나라 말 ‘알부스’(하얀)와 연결시켰다.
<박물지> 의 저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와 <지리학> 의 저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거치며, 알비온은 고대 세계에서 ‘흰 땅’이라는 뜻을 담아 브리튼섬을 가리키는 보편적 이름이 되었다. 지리학> 박물지>
마지막으로 디에프를 가본 게 1997년 늦가을이다. 바닷가의 레스토랑에서 훈제 연어를 먹었는데, 치통이 심하던 때여서 그 부드러운 연어조차 씹기가 쉽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올 즈음엔 치통이 더 심해졌다. 그런데 홍세화씨한테 전혀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짙은 안개가 파리로 돌아오는 밤길을 하염없이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장 없이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만큼 짙은 안개였다. 긴장 상태로 운전하는 이 옆에서 이가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는 없었다. 백악을 보고 돌아오다 하얀 수증기에 갇힌 셈이다. 그 안개를 겪고 나서, 어둠은 검정 속에만이 아니라 하양 속에도 있음을 알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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