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후우….”
23일 오후 1시께 전남 나주시 산포면 등정리 들녘. 도로 변에서 벼를 말리던 문채식(82)씨는 고무래질을 하다 말고 바닥에 주저 앉아 땅이 꺼질 듯 연방 한숨을 토해냈다.
“나락을 한번 보시오. 비를 맞아 때깔이 시커멓지라잉. 내 속도 그러요.” 낮술을 한 잔 걸쳤는지 술냄새를 풍기던 문씨는 “이 나락을 찧으면 싸래기 밖에 안 나온다”며 “올해는 가을 장마로 수확량도 크게 줄었는데, 쌀값까지 떨어져 큰일 났다”고 하소연했다.
한숨만 가득한 농촌 들녘
호남 최대 곡창지대인 나주평야가 농민들의 한숨소리로 넘쳐 나고 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흉년, 곤두박질 치는 쌀값, 쌓여가는 농가부채…. 눈 앞에 펼쳐진 암담한 현실에 농민들의 몸과 마음은 잔뜩 움츠러들고 있었다.
“아따, 죽겄소.” 인근 봉황면 죽석리에서 6,611㎡(2,000평)의 논농사를 짓는 장진철(70)씨는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최소한 40㎏짜리 벼 120가마를 수확해야 할 논에서 불과 70가마밖에 건지지 못한 터였다.
“벼 이삭이 팰 무렵 비가 많이 온 데다 벼멸구까지 기승을 부려서 그려. 다른 사람들 논도 모두 마찬가지여. 올해도 빚 갚기는커녕 또 빚을 내야겠네….”
농협 빚 1억원을 안고 있는 장씨는 당장 올 겨울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여서 내년 농사비 마련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김선례(66ㆍ여)씨도 거들었다. “수확량이 준 것도 문제지만 저런 나락을 찧으면 쌀이 70%도 안 나와요. 수확량이 모르긴 몰라도 30%정도는 줄었어요.”
농민들은 “수확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는데도 정부는 전국 쌀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불과 3.8%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쌀값을 떨어뜨리려는 정부의 속셈”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농민들 시위 예고
정부는 수확기 산지 쌀 가격이 목표가격보다 낮아질 경우 그 차액의 85%를 보전해주는 쌀 소득보전 직불금 목표가격을 17만83원(80㎏ 기준)에서 16만 1,265원으로 낮출 예정이어서 농민들의 근심은 커지고 있다.
논 8,595㎡(2,600평)을 경작하는 김용식(54ㆍ나주시 남평읍)씨는 “흉작에 쌀 품질까지 떨어진 데다 쌀 시장 개방으로 인한 쌀값하락으로 농가소득이 크게 줄어들게 뻔한데 정부마저 쌀 목표가격까지 내리면 농민들은 다 죽는다”고 흥분했다.
논 2,000평을 빌려 소작하고 있는 강연례(53ㆍ여)씨는 “200평 당 20만원의 임대료와 농약대, 비료대, 인건비, 타작료 등을 빼고 쌀값 하락을 감안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문제는 산지 쌀 상인들마저 정부의 가격인하 움직임에 편승해 산지 쌀값 후려치기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공산면 김창선(39)씨는 “일부 상인들이 쌀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을 낸 뒤 농민들에게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팔도록 부추겨 쌀값하락을 부채질 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나주지역 햅쌀(80㎏) 가격은 13만6,000원선으로 지난해보다 1만원 가량 떨어졌다.
정부의 직불금 인하 소식에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단체들은 12일 보성에서 정부의 쌀값 보장과 농가 소득보전 대책을 촉구하는 나락 소각 시위를 벌이며 ‘전면전’을 선포한 상태다. 이들은 “정부가 직불금 목표가격을 낮추면 이 달 말 전남도청 앞 벼 적재시위에 이어 내달 중순에는 대규모 상경 시위를 벌이는 등 전면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나주=글ㆍ사진 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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