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결별을 심각히 고려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 없는 군부 지도자였음에도 대 테러전을 명분으로 정치적 면죄부를 준 무샤라프 정권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반민주적 행태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10년 가까이 무샤라프를 파트너로 인정한 것은 알 카에다를 소탕하는 데 파키스탄이 갖고 있는 전략적 가치를 주목한 결과였다. 그러나 북서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가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지고, 군부마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미국이 무샤라프의 파키스탄을 지지할 명분은 사라졌다.
애초 미국 정부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와 권력을 분점하는 방식으로 무샤라프 정권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서방에는 온건파로 평가 받는 그를 대체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두 차례 총리를 지낸 부토의 무시 못할 지지세력이 흔들리는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무샤라프와 부토와의 권력 분점 밀실합의는 이런 점을 노린 미국 정부의 강력한 중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부토가 8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18일 카라치 국제공항에 발을 디딘 지 수시간만에 터진 테러 참사는 부토의 귀국이 파키스탄 정정을 오히려 더 취약하게 하는 악수였음이 드러났다.
부토는 미국이 권력의 한 축으로 인정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형적인 친미파 인사이다.
그러나 미국과 미국의 대 테러전에 가세한 정부에 대한 반미ㆍ반정부 여론, 올해 봄 이슬람 급진세력인 ‘랄 마스지드(붉은 사원)’에 대한 무력진압 이후 거세지는 이슬람 무장세력의 준동은 부토에게 더 이상 호의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부토에 대한 지지도는 28%로 계속 떨어지고 있는 반면, 무샤라프의 최대 정적인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반 무샤라프 정서에 힘입어 지지도가 불과 며칠만에 36%로 뛰어올랐다.
무샤라프 정권이 지리멸렬해진 데는 손발이 맞지 않는 미국 정부의 대 파키스탄 정책도 한 몫 했다. 미국 군부는 오사마 빈 라덴 생포를, 중앙정보국(CIA)은 핵무기 암시장 단속을, 국무부는 파키스탄의 민주화를 각각 무샤라프 정권과의 공조 1순위로 설정하면서 행정력을 분산했다.
여기에다 무사랴프 개인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전략적 여지를 스스로 없애는 우를 저질렀다.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테레시타 섀퍼 연구원은 “미국은 한 사람, 무샤라프를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미국이 파키스탄의 친구가 아닌 무샤라프의 친구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었다”고 비판했다.
파키스탄 정국을 뒤흔들 수 있는 지뢰는 아직도 도처에 깔려 있다. 무샤라프가 군총사령관을 겸임한 상태에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유보 상태이고, 무샤라프가 권력분점의 사전 절차로 약속한 부토에 대한 사면 역시 대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
무샤라프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내달 재차 귀국을 시도하겠다고 밝힌 샤리프 전 총리의 귀국 성사 여부도 관심이다. 어느 것 하나 무샤라프 대통령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정권이 무너지거나 비상사태 선포가 불가피한 핵폭탄급 뇌관들이다.
용도 폐기된 무샤라프를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이후의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게 미국의 고민이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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