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중학교 기숙사 생활은 매우 규율이 엄격하였다. 그러나 젊은 우리들에게는 나름대로 낭만과 포부도 있었다. 오락시간에는 유행가를 부르기도 하고, 한밤중에 참외와 도마도 서리를 해다가 나누어먹는 재미도 있었다. 당시 기숙사의 학생대표는 현대 정치사에서 3金으로 회자되어 온 김종필 씨였다. 그의 책꽂이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고, 사상전집까지 읽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예술에도 재능이 있어서 서화에 능하고 만돌린도 연주할 줄 알아서 사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해방 후 문교부차관을 지낸 한상봉 선생(영어 담당), 박정희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낸 청백리 신두영 선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다. 또 동양철학의 권위자이며, 유교에 조예가 깊은 민태식 선생은 내가 육영사업에 뜻을 두자 ‘건양(建陽)’이라는 학교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맏형과 같은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전기인 서울대 의대 전문부(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지원했다. 그러나 첫 시험에 실패하고 후기인 세브란스의대에 지원했다.
입학시험은 8월에 치른 것으로 기억된다. 폭우가 내려 경부선철도의 천안-평택 사이의 선로가 유실되어 공주에서 천안까지 트럭을 타고 가서 성환에 사는 동창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평택까지 걸어가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까스로 용산에 있는 둘째 형님 집에 도착하여 시험을 치렀다. 지금은 한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를 이틀이 걸려서 갔으니…
의과대학 시험에 합격하여 1946년 9월에 입학식을 가졌다. 당시 의료계나 대학에는 몇 개과를 제외하고는 전공교수가 많지 않았다. 전국의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던 일본인 교수들이 해방 후 자기나라로 돌아간 후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우리 교수요원들로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브란스는 원래부터 우리 교수들이 많이 있어서 다른 대학에 인력지원을 해줄 정도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숫자가 부족하였다.
교실도 모자랐다. 가건물로 된 2층을 2, 3학년이 사용하고 1학년은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를, 4학년은 임상강의실을 사용하였다. 1학년 때는 해부학, 생리학 등 기초과목이 많았는데 해부학실습은 포르말린에 보존하였던 사체 5~6구를 내놓고 하다가 그 방에서 도시락을 먹는 일도 있었다, 생리학은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던 김명선 교수가 담당했는데 거의 매 강의마다 ‘퀴즈’라고 하는 짧은 시험문제를 내곤 했다. 학교를 끔찍이 사랑해서 그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시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분으로 유명했다.
3학년부터 임상실습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의학에는 미개척 분야가 많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수술을 하게 되면 다른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려서 견학을 오도록 할 정도였다. 안과에는 최재유 선생이 계셨는데 최고의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명의로 알려졌거니와 명강의로도 유명했다. 후에 보사부장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병리학의 윤일선 교수는 알레르기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미생물학의 유 준 교수는 나병(문둥병)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약리학의 이우주 선생은 후에 연세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세브란스병원 원장을 지낸 문창모 선생은 90세에 이르기까지 환자들을 진료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나의 세브란스의대 졸업식은 1950년 6월 17일에 있었다. 일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에 중학교를 졸업하더니, 이번에는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8일 전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참으로 기구한 일이다. 졸업 후 7월 1일부터 용산의 철도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어 며칠 여유가 있기에 졸업식 이튿날 고향에 내려갔는데 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새 국군이 대전과 공주를 포기하였다는 소문과 함께 우리고향 양촌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면에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곧바로 우익 인사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지주이자 지역의 유지였던 아버지는 곧바로 인민위원회에 끌려가셨는데 이튿날 무사히 돌아오셨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덕을 베풀며 살았기에 인민위원이었던 마을사람이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둘째 형 일가족과 누님 한 분이 폭격에 무참하게 희생됐다. 9ㆍ28 수복 후에 서울에 올라가 대학에 다니며 묵었던 형 집을 찾아가 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고 첫 인턴 발령을 받았던 철도병원도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없었다.
인턴의 꿈도 깨어져 버린 채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10월부터 전주 구호병원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여 이듬해 9월까지 1년간 근무하였다. 환자들은 주로 피난민이었고 국민방위군으로 동원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간혹 인민군 부상병들이 입원하기도 했다. 의과대학 졸업 후 나의 인턴생활은 이렇게 전후의 잿더미 속에서 시작되었다.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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