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 실천문학사"늦가을 햇볕이 너무 아까워"… 자연과 하나였던 그때 기억
“언젠가는, 벗은 팔에 따스하게 와 닿는 늦가을 햇볕의 감각에 자극되어 충동적으로 고향 가는 비행기를 탄 적도 있었다. 그렇다. 늦가을 햇빛이 서울의 내 집 베란다에 따스하게 비칠 때면, 으레 고향 옛집의 마당에 멍석 깔고 노란 햇좁쌀을 널어 말리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햇볕을 허비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 시장에서 표고버섯이나 가지나물이라도 사다가 말려야 겨우 불편한 마음이 누그러든다.”
이맘때 늦가을 햇볕에 마음을 빼앗기다보면 꼭 현기영(66)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1999)의 이 구절이 생각난다. 겨울 지난 뒤 너무 화사하게 다가와서 오히려 쓸쓸한 봄 햇볕, 지상의 모든 걸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 내리쬐는 여름 땡볕, 쌓인 눈 위에 드문드문 비치는 인색한 겨울 햇빛과 늦가을 햇볕은 완연히 다르다. 지상에>
그 빛은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미처 여물지 못한 것들, 그리고 조락을 앞둔 것들을 어루만지는 위안의 빛이다. 옛적 마을 뒤편 언덕이나 살던 집 마당 혹은 골목길에 할머니 어머니들이 내다 말리던 빨간 고추더미에 내리비치던 따스한 볕이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는 현기영이 자신의 고향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유년시절을 복원한 성장소설이다. 침을 흘리고 다니는 통에 부적처럼 돼지코를 잘라 목에 걸고 다니던 아이, 용두암 앞바다에서 ‘몸에는 지느러미 돋고 입에는 아가미가 난 듯’ 어머니가 옷을 가져간 줄도 모르고 헤엄치고 놀다 여자아이들이 볼세라 불알만 잡고 뛰던 소년, 아버지의 부재에 이상(李箱)과 카뮈를 빌미로 반항하던 학창시절. “자연의 일부였으므로 부끄럼없고 무구했던 시절, 나에게는 그 시절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세월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진다”고 현기영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다. 지상에>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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