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변절자에서 영국 귀족으로 변신한 이중간첩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이 언론에 소개됐다.
BBC 인터넷판 20일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8일 러시아인 올레그 고르디예프스키(69)에게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성조지 기사단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고 보도했다.
고르디예프스키는 한때 영국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불린 옛 소련정보기관 KGB의 요원으로, 1960년대 덴마크 주재원으로 파견됐다가 74년 영국 비밀정보국(MI6)에 포섭돼 조국을 배반하고 이중간첩으로 암약한 인물이다. 그가 영국에 협력한 동기는 옛 소련의 전제적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고르디예프스키의 위장 활동은 대단히 정밀하고 뛰어나 모스크바의 KGB 본부가 그의 '매국 행위'를 오히려 높이 평가, 런던 책임자로 임명해 본의 아니게 이중간첩 일을 도와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빚어졌다.
그의 정보 누설로 영국에서 은밀히 움직이던 소련의 주요 스파이 25명이 붙잡히면서 현지 간첩망이 사실상 괴멸된 일도 있다. 그래서 고르디예프스키는 냉전시대에 조국을 배반한 최고위급 거물 간첩으로 꼽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KGB는 고르디예프스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은밀히 조사에 착수한 다음 85년 그를 고국으로 소환했다. 그때 KGB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고르디예프스키에게 약물을 주입해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실패하자 그를 풀어주었는데 MI6이 잠시 산책을 나온 고르디예스키를 빼돌려 감시자를 따돌리고 폴란드 국경으로 가는 기차에 태웠다. 국경에서 그를 맞은 영국 요원은 승용차 트렁크에 고르디예프스키를 숨기고 담요로 몸을 싸 러시아 검문소의 적외선 체온측정기를 무사히 통과시키는, 세계첩보사에서 손에 꼽히는 작전을 감행해 성공했다.
고르디예프스키는 그 뒤 영국 정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그가 제공한 특급 정보에서 큰 도움을 받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극비리에 그를 백악관에 초청, 접견했다.
하지만 배신자는 철저히 응징하는 KGB와 그 후신인 러시아 연방대외정보국(SVR)은 고르디예프스키를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암살 기회를 노렸다. 때문에 고르디예프스키는 지난 10년간 줄곧 영국에만 머물며 가발을 착용하고 수염을 기르는 등 변장을 했고 거주지도 수시로 옮겼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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