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고, 풀고, 까고, 떨고, 늘어놓고….
넘쳐난다. 온 세상이 ‘구라’다. 돋보이기 위해,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구라를 입과 표정, 옷차림에 달고 산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부장에게 눈웃음을 흘리는 팀장이나, ‘어머머…’ 순진한 척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그녀나, 국민소득 몇 만 달러 주먹을 치켜드는 대선후보나…. 본질은 매한가지. 모두, 구라다!
구라, 욕망과 가식의 연금술
구라란 뭘까? 누구나 입에, 혹은 가슴에 구라를 한 다발씩 담고 살지만 정작 구라의 정확한 뜻은 모른다. 구라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속설이 있다.
‘속이다’라는 뜻의 일본어 ‘쿠라마스(晦ます)’에서 파생됐다는 설, 막부시대 비싼 쇠고기 대신 죽은 말고기를 몰래 팔았는데 그 고기 빛깔이 벚꽃(사쿠라)처럼 분홍빛인 데서 유래됐다는 설, 입 ‘구(口)’에 빛날 ‘라(羅)’를 더한 것이라는 설…. 하지만 그런 얘기들도 십중팔구 구라일 듯.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구라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돼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구라가 지칭하는 외연은 훨씬 넓다. ‘강철 말발’ ‘뒷담화’ ‘막말’ 등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통칭하는 말로도 쓰이고, ‘사기’ ‘아부’ ‘이간질’ 등 처세술까지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요컨대, 일상적인 대화의 틀을 벗어나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과장해 표현하는 것을 모두 구라라고 할 수 있다.
김효창 한국사이버대 교수(상담학부)는 구라를 치는 까닭을 인간의 자기과시의 욕구에서 찾았다. 사람은 대화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동감과 재미를 주기 위해 내용과 표현을 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 김용옥이 강연할 때 상소리를 하는 것, 개그맨 박명수가 방송에서 호통을 치는 것도 모두 자기현시를 위한 일종의 구라라는 관점이다. 돋보이고 싶은 욕망과 이미지로 본질을 부풀리는 언어적 기교가 만날 때, 구라는 입을 뚫고 세상으로 나온다.
21세기 신인류, 호모 구라덴스(구라를 치는 인간)
구라는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TV 황금시간대는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보다, 목구멍에 6기통 엔진을 단 듯 구라 잘 푸는 연예인들이 차지했다. 직장에서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능력을 인정 받으려면 그럴듯하게 구라를 풀 수 있어야 한다. 대선후보 공약집? 요즘 누가 그런 것 들춰보기라도 하는가.
그저 주부 대상 아침 TV 프로그램에 나와 구수하게 구라를 늘어놓으면 표가 된다. 미팅에서 매일 폭탄만 맞는다면, 성형외과보다 화술학원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21세기 인간의 첫번째 성공 조건은, 바로 구라를 까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구라는 꼭 가식적이고 나쁜 것일까. 그렇게 규정한다면 세상은 훨씬 삭막해질 것이다. 직장 동료의 너스레에 ‘재미 없다’ ‘짜증 나서 일을 할 수 없다’고 반응하거나, 구라라는 포장 없이 아내에게 ‘반찬이 짜다’ ‘살이 왜 이렇게 쪘느냐’라는 말을 쏟아낸다면 세상의 폭력과 갈등은 한층 깊어질 것이다.
송재룡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구라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소통방식”이라며 “구라를 동원한 대화로 파격과 일탈,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또 “구라는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충격”이라며 사회 문제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구라의 순기능도 지적했다.
그러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구라, 식상하게 반복되는 구라는 사회적 일탈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도 “구라가 먹히는 이유는 세상에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며 “현대의 대중은 심각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대상, 또는 그런 삶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그맨 전유성처럼 폭넓은 지식과 해학, 듣다 보면 마음 속으로부터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깊이와 관조가 있는 구라”를 바람직한 구라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라가 판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해학과 유머를 담고 있다고는 하나, ‘지적 사기술’이라는 구라의 본질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는 “요즘 횡행하는 구라 열풍은 즐거움을 유발하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로서의 구라로 보기 힘들다”며 “후기산업사회의 특성인 정보 우선주의, 육체적 노동보다 머리를 굴려서 잘 살아보려는 행태가 반영된 것이 구라열풍”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신정아 사건 등 학력위조도 구라로 표출되는 지적 사기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 HOW TO 구라 "말한마디로 내편으로"
#꾸짖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직장에서 말을 듣지 않는 아랫사람을 야단치려면 금요일 저녁 퇴근 전을 노리자. 야단친 다음 날 얼굴을 마주하는 서먹함도 없을 뿐더러 당사자도 2~3일동안 냉정하게 야단맞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 효과적이다.
#플레이보이는 처음부터 무리한 제안을 하지 않는다
여성을 유혹할 때는 “잠깐 차라도 마시러 가시지 않겠습니까”로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여성은 ‘차를 함께 마셨는데 식사 한 번 같이 하는 게 뭐 어때’에서 ‘식사를 했으니 가볍게 한잔 하러 가는 것 정도야’로 경계를 늦추게 된다. 큰 부탁을 할 때도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
#'No'라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라
데이트에서 “술 한 잔 하실래요?” “노래방 어떠세요?”라는 질문은 ‘OK’라는 대답을 들을 확률이 고작해야 50%다. 하지만 “대체로 놀 때는 한 잔 하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노래방?”이라고 물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대답한 그녀도 거절하기 곤란한 것은 당연지사.
#맑은 날씨는 죽은 기획안도 살린다
중요한 계약이나 상담,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는 되도록 맑은 날 하자. 미국 심리학자 커닝감의 실험 결과 사람들은 비 오는 날보다 맑은 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실내ㆍ외, 계절과도 상관없이 항상 동일하게 나타났다.
#모욕적인 말로 상대를 감동시킨다
가끔은 모욕적인 말로 시선을 끄는 것도 좋은 방법. 모욕적인 말은 짧게, 친절하고 자상한 어조로 자신이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이어서 한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오늘 화장이 좀 이상한 걸” 정도로 지적한 후 “특별한 당신에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추천하겠다”고 하면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
#호의에 대한 보답심리를 이용한다
어려운 계약을 성사시킬 때 “제발 계약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은 좋지 않다. “부디 귀사와 같은 훌륭한 회사와 계약하고 싶습니다”라고 호의를 보여준 다음 “귀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본다. 먼저 호의를 보이면 상대는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부탁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상대방이 긴장을 늦출 때를 놓치지 마라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의 말에 계속 맞장구를 치다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긴장을 늦추고 감정적으로 동화된 상태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훨씬 효과적이다. <형사 콜롬보> 에서 주인공이 돌아가는 것처럼 행동해 상대방이 마음을 놓게 한 후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아, 이거 정말.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라는 것도 같은 이치다. 형사>
※주의사항 상대방을 봐가며 구라 대화법을 사용할 것. 아예 관심이 없는 이성에게 던지는 유혹의 말은 무의미하며, “술이냐 노래방이냐”를 연발하면서 매달리는 것은 구차할 뿐. 모욕적인 말로 시선을 끌려다가 뺨을 맞을 수도 있으니 수위 조절에 신경 쓸 것.
참고: <구라필살기> (오모시로 심리학회 지음ㆍ이가서 발행) 구라필살기>
■ 김구라가 주도하는 구라 TV 전성시대
TV는 말 그대로 ‘구라의 전성시대’다. 구라는 사전적 의미가 거짓말, 도박장의 사기를 일컫는 속어이지만 대중매체가 대중에게 알려준 정의는 사실 이보다 훨씬 의미가 다양하다. 상대를 향한 거침없는 속내 털어놓기, 혹은 앞에서 지껄이는 ‘뒷담화’를 포함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포함해 각종 버라이어티 쇼들은 끊임없이 지껄인다. 게스트가 등장하면 MC들이 달라붙어 말의 공세를 앞세워 코너로 밀어붙이고 시청자는 이를 즐긴다. 혹은 방송에서 경험하지 못했지만 일상에서 너무나 공감이 가는 언어(욕과 각종 속어들)가 오가는 것을 TV로 접하며 속 시원함을 느낀다. 너무나 단세포적인 오락이지만 이게 먹히니 TV는 점점 구라에 넉넉한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구라가 판치는 TV의 현재 상황은 개그맨 김구라(본명 김현동)의 인기로 가장 잘 설명된다. 그는 아예 자기의 예명을 구라로 하고, 각종 욕설(물론 방송용으로 순화된)과 직설화법으로 최근 지상파 3사는 물론 케이블 TV의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김구라는 과거 같으면 절대 공중파에서 허용이 되지 않았을 캐릭터이다. 예전의 버라이어티쇼는 젠틀하고 똑똑한 이미지의 신동엽, 포용력이 강조된 유재석, 강하게 밀어붙이지만 막무가내의 모습으로 비친 강호동 등으로 충분했다. 이들이 게스트들과 티격태격하는 정도로 시청자는 만족했다. 하지만 ‘김구라 류(類)’의 연예인들이 점령한 요즘 프로그램들은 방송의 한계 위에서 줄을 타는 구라를 쏟아내며 인기곡선을 그린다.
김구라가 출연하는 SBS <라인업> 과 MBC <황금어장> 의 ‘라디오 스타’는 모두 독한 말을 쏟아내며 함께 나온 연예인들을 짓밟는 과정을 그린다. ‘개새끼’라 욕을 하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애기를 내뱉는다. 어째서 이런 구라가 TV를 점령하는 것일까. 황금어장> 라인업>
김구라의 구라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가식이 없다. “세상은 줄을 잘 서야 한다” 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인기에 대해 “지금은 시대가 나하고 맞아 많은 프로그램에서 찾는 것”이라고 스스로 분석한다.
사실 시청자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선 사정없이 선배를 견제하고 처세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현실적인 ‘구라’를 날리는 그의 모습에 열광한다. 비록 그가 도덕성 논란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포장하지 않아 세상의 비린내가 그대로 묻어 있는 개그에 직장인 남성들을 중심으로 호응을 보내는 것이다.
■ 구라 방송은 옳은가?
문제는 방송의 수위이다. 구라를 들으며 즐거운 시청자가 있는 반면, 쌍 욕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분명히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래서 구라 방송은 인기만큼이나 만만찮은 비판을 받고 있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는 “오락프로그램에서 공공성을 너무 엄격하게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연예인들이 끼리끼리 놀면서 그들의 권력관계와 뒷담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오락프로그램의 아이디어 부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특히 이런 오락 프로그램들은 서로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웃음의 코드가 되면서 갈수록 자극적인 표현과 인격 무시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웃으려고 보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이런 것들을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서로를 씹고 말로 무너뜨리는 ‘구라 방송’ 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문화연대 김형진 미디어문화센터 팀장은 “지상파 프로그램은 불특정 다수가 시청하기 때문에 분명히 방송의 수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며 “게스트들끼리 비방하고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는 것은 인격을 서로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비춰주기 때문에 반드시 내용 평가가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이어 “방송 콘텐츠의 질적인 문제는 방송제작과정의 총체적인 문제가 낳은 결과”라고 덧붙였다.
‘구라 방송’은 자극을 원하는 시청자들에게 쉽게 어필하는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프로그램 자체를 알맹이가 없는 것으로 몰아간다는 단점이 있다. 1시간 가량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지만 시청자 입장에선 단지 그들만의 잡담일 뿐이다. 아무리 신나게 서로 욕을 해도 헛웃음만 나온다는 시청자도 많다.
이런 종류의 방송은 MBC <무한도전> 의 성공 이후 딱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경쟁 프로그램들에서 연달아 발견됐다는 것도 특이할 점이다. 무한도전>
<무한도전> 도 각 캐릭터가 서로를 헐뜯고 공격하는 ‘구라’의 양상을 담고 있지만 매 회 스포츠스타 등 게스트를 불러들이고 무인도 체험, 서울시 돌아다니기와 같은 독특한 코너를 집어넣어 인기를 끈 반면 최근의 ‘구라’ 프로그램들은 오직 출연자들의 입담에만 의지하고 있는 경향이 크다. 무한도전>
SBS 프로듀서 P씨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들의 토크는 재미를 이끌어내는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즘 프로그램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제防坪?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내면서 거기에 출연자들의 재능을 녹여내야 하는데 요즘 프로그램들은 지나칠 정도로 출연자의 입담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했다.
MBC 프로듀서 S씨도 “오락 프로들이 대부분 유명 진행자와 게스트를 섭외해서 그들 중심으로 방송을 이룬다. 그렇게 하면 일단 안정적인 시청률이 보장되는 장점이 있지만 입담으로 이뤄지는 프로그램은 창조성이 떨어진다. 이게 오락 프로그램의 한계를 만든다”고 말했다.
‘구라 방송’ 번영의 이면엔 고질적인 우리 방송의 소재 빈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라도 한 두 번이지 자꾸 반복되면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 TV 속 구라 사례
TV에 등장해 반향을 일으켰던 구라 명대사들. 속내를 드러내 속시원하다는 평도 있지만 방송에 적절치 않다는 비난을 받았던 말들이다.
"야 이 개새끼야."
-<라인업> 에서 김구라가 김경민에게 '욕시범'을 보이며 한 말. 라인업>
"한 7년전 스타일? 옛날 MBC 방송 보는 기분이 있네요."
-'라디오 스타'에서 윤종신이 복귀한 김국진에게 한 말.
"나 잘되기도 힘든데 내가 뭘 너를 신경 써."
-<무한도전> 에서 박명수가 자신이 더 주목 받아야 한다면서 다른 출연자들에게. 무한도전>
"5년 뒤에 가 봐야 알아요 이루 군이 지금 돈 벌이가 되지만 5년 뒤에 가 봐야 알거든요."
-<스타골든벨> 에서 태진아가 5년 뒤에 은퇴하고 아내와 아들인 가수 이루를 위해 살겠다는 말을 하자 정형돈이 두고 봐야 안다며. 스타골든벨>
"불법 다운로드로 음악 듣는 사람은 닥치고 있어라."
-'무릎 팍 도사'의 신해철, 불법 다운로드한 파일을 듣고 자신의 음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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