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루비나씨는 사석에서 그를 “디자이너가 존경할 만한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패션사진작가 김용호씨는 “유명해지고 나서도 초심을 잃지 않는 드물게 보는 사람”이라 평했다. 이상봉씨가 주인공이다.
패션의 변방에서 나고 자란 그가 2002년 파리컬렉션 진출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서조차 반응은 “몇 번 하다 말겠지”였다. 그러나 그는 2006년 한글패션으로 파리 패션계에서 ‘독창적이며 전혀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찬사 속에 화려하게 비상했다.
지금은 한국 패션계의 또 한 사람의 마이다스로 꼽힌다. 지난 16일부터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라 비타 이상봉’이라는 이름으로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초대전을 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면서도 여전히 “디자이너로서 끊임없는 진화를 꿈꾼다”는 라 비타 이상봉의 실체.
이씨의 별명은 ‘검은 망토’다. 늘 검은색 커다란 외투를 둘둘 말아 입고 다닌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날도 검은색 바지에 재킷 차림이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면 바지는 스키니진, 재킷은 그 유명한 ‘한글패션’ 제품으로 트렌드와 자기 정체성을 절묘하게 매치시켰다는 정도.
최근 이씨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마이다스의 손’이다. 기업체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고, 놀랍게도 내놓는 협업작업마다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LG사이언과 함께 한 샤인폰 블랙라벨이 일찌감치 매진된 것은 물론 최근 이마트와 손잡고 출시한 침구류 ‘이상봉 메종’, 행남자기를 위해 디자인한 테이블웨어 컬렉션, 스위스 유라 브랜드와 함께 한 커피잔 컬렉션 등이 모두 출시와 함께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의 한글 디자인을 덧입힌 담배는 KT&G에서 최고가로 출시될 예정인데, 이달 26일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패션쇼도 펼친다. 러시아는 현재 중국과 함께 세계 패션기업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주목하는 시장이다.
이씨의 화려한 비상은 따지고 보면 한글패션에 힘입은 바 크다. 누구도 감히 한글이 패션의 모티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한글에 주목했다.
“늘 내 디자인의 주제는 한국적인 것이었어요. 그런데 가장 한국적인 것이 뭔가 생각할 때 막상 딱 잡히는 게 없는 거예요. 한복? 무당? 등등…. 그렇게 방황하다 2006년 2월 임옥상, 장사익씨와 함께 달빛 그림자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가지면서 한글에 눈이 박혔죠. 가장 독창적인 우리 것, 그건 한글이잖아! 깨달은 거죠.”
한글을 모티프로 한 패션 컬렉션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상봉의 주가를 한껏 높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족쇄이기도 했다. 한글패션 이후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상봉= 한글패션’으로 고정되는 것이 싫었다.
“두 시즌째 한글패션을 발표하고 나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자꾸 전시하자, 콜래보레이션해보자 등등 제안이 들어오는 거예요. 한글패션으로 그만큼 사랑받았는데 그 성과를 여러 사람과 나눌 줄도 알아야겠다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마침 생활 전반에서 디자인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도 이씨의 행보에 활력을 더했다. “디자이너가 옷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 감각과 의지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싶거든요. 생활문화가 고도화할수록 일상의 디자인문화가 중요해지는 만큼 디자이너가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이 쓰여진 커피잔이나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그 자체로 디자인 모티프가 된 포근한 이불 등은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특히 맘에 든다.
“사실은 1996년에 이미 신세계백화점과 손잡고 이상봉 아트 컬렉션을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스포츠웨어부터 가구 그릇까지 망라한 것이었는데 그땐 딱 1년 만에 접었죠. 시기상조였던 것 같아요. 그때의 꿈을 지금 원없이 풀고 있으니 행복하죠.”
이씨의 옷은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드물게 지난해에만 해외 20개국에 100만달러어치를 수출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드레스 한 장에 300만~400만원을 호가하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이만한 수출액을 올린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비록 물량은 많지 않아도 아르마니, 에스카다 같은 고가 브랜드와 해외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는 셈이다.
이씨는 대학시절 한 교수가 던진 독한 비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것도 옷이라고 만들었느냐, 차라리 학예회를 해라”였다.
“그때 주저앉았으면 아마도 지금의 이상봉은 없겠죠. 하지만 저는 상처까지 보듬고 가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보니 상처와 오기가 나를 버틴 힘이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는 디자이너로서 열정을 갖고 살자는 초심을 지키기 위해 20여년 전 만들었던 명함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한다. 그 명함을 만들어준 사람조차 “촌스러우니 바꾸라”?권했지만 그는 “내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잊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세이 미야케나 발렌티노, 이브 생 로랑처럼 멋지게 은퇴할 날을 꿈꾼다.
“디자이너로서 열정을 바쳐 브랜드를 일구고 당당하게 은퇴하는 모습은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잖아요. 지금 희망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디자이너로 남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후배들에게 좋은 발판을 남겨주면서 멋지게 은퇴하는 것이죠. 유능한 젊은 디자이너를 통해 이상봉 브랜드는 계속되어야 할 테니까요.”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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