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친절한 복희씨' 황혼의 소외… 그래도 희망 잃지 않는 그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친절한 복희씨' 황혼의 소외… 그래도 희망 잃지 않는 그들

입력
2007.10.20 00:03
0 0

/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발행·302쪽·9500원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박완서(76)씨가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후 9년 만에 9편의 단편을 담아 9번째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냈다.

작년 ‘문인 100명이 선정한 가장 좋은 소설’로 뽑힌 표제작, 2001년 제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그리움을 위하여’ 등 2001년부터 작년까지 발표한 단편을 묶었다.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씨는 “그간 적조했다”는 인사에 “2000년대 들어서도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을 비롯해 내 체력에 알맞게 꾸준히 써왔다”고 답했다.

“박완서 이전 한국 소설에서 여성 문제는 사랑에 집착하는 젊은 여자들의 관점에 국한돼 있었다”는 한 평론가의 지적대로 박씨는 여성 문제를 사회적 맥락에서 위치 짓고 탐색하는 작업을 통해 독특한 문학적 입지를 구축해왔다.

아울러 사랑으로 치장된 결혼이 실은 자기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계약에 가까움을 폭로하며 중산층의 위선과 허위에 대한 일가견을 피력해 왔다. “작품 밑그림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찾았을 때 느끼는 황홀경이야말로 소설 쓰는 재미”라는 노작가는 예의 탁월한 어휘 감각으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한바탕 사설을 풀어놓는다.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표제작은 자신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홀아비와 결혼해 살아온 ‘나’의 노년 생활을 그렸다. 가족에 헌신적인 남편, 훌륭히 장성한 오남매 등 남 보기엔 평탄한 가정을 꾸려온 듯하지만 정작 ‘나’는 친정에서 훔쳐온, 아편 덩어리가 든 생철갑을 만지작대며 여차하면 이걸 먹고 죽자는 생각으로 아등바등 삶을 견뎌왔다.

반신불수가 된 남편이 자기 핑계를 대며 비아그라를 찾았다는 약사의 말에 모욕감을 느낀 ‘나’는 무작정 가출해 평생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한강에 던져버린다. 그러면서 “허공에서 치마를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고통받는 여성의 입장에서 가부장적 가족 로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박씨가 ‘(유사) 가족의 탄생’이라 부를 만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느낀다는 작품 ‘대범한 밥상’에서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나’는 불쑥 시골에 사는 동창 ‘경실’을 찾는다. 경실은 비행기 사고로 양친을 잃은 외손주들을, 아이들의 친할아버지인 사돈과 한 집에 살며 키웠다.

사돈간의 동거라는 ‘엽기 사건’에 갖은 풍문이 보태지면서 경실은 두고두고 호들갑스러운 동창들의 입방아에 찧여왔다. ‘나’의 추궁에 손사래를 칠 줄 알았던 경실은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며 되레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나’ 또한 그녀의 입장을 점점 수긍하게 된다.

이번 책에는 노년 세대가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소외에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촛불 밝힌 식탁’이 특히 그렇다. 은퇴한 노부부는 아들 내외에게 큰 평수의 아파트를 함께 얻어 살림을 합치자고 제안했다가 며느리의 직언에 당혹해 한다. “눈물나게 아이들 키워 이제 돈 들 일만 남았지 잔손 갈 일은 없어져서 숨 돌리게 되니까 같이 사시자고요?” 결국 노부부는 한 아파트 단지에 아들 가족과 따로 집을 얻는다. 아쉬운 대로 어머니는 손수 만든 음식을 아들 집에 나르는 일을 낙으로 삼지만 집이 비어 허탕을 치는 일이 잦아진다. 부인이 또 헛수고할까봐 아들네 창에 불 들어왔나 살피던 아버지는 불 꺼진 창 너머로 “모닥불의 잔광 같은 희미한 빛”을 알아채고야 만다.

‘마흔아홉 살’ 등에서 다룬 중산층의 이중성에 대한 태도가 예전보단 너그러워졌다는 지적에 박씨는 “중산층이 세상을 살아가며 품고 있는 ‘보호막’을 들추고 그 실상을 보여주고픈 욕구는 여전히 강하다”면서도 “위선을 보호막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내가 덜 신랄해지긴 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나이쯤 되니 쓰는 일이 지루해지기도 한다”면서도 “그래도 작품을 쓰는 일이 늘 나를 새롭게 해줬고 그것을 감사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