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구원투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위기관리 능력'이다.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갖추려면 무엇보다 상대 타자를 압도할 수 있는 결정구가 필요하다. 히든카드에 해당되는 결정구 하나에 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셈이다.
올해 4월 서울 여의도 LG 빌딩에서 열린 1분기 실적 발표회는 LG필립스LCD 권영수 사장의 깜짝 발언으로 크게 술렁였다. 권 사장은 "그 동안 투자를 검토해 오던 5.5세대 대신 차세대 투자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권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경영메시지를 통해 "과거처럼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공장을 지어 대응하던 시절은 끝났다"며 "이제부터는 기존 생산시설 효율의 극대화를 통해 신규 수요에 대응하도록 투자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기에 빠진 LG필립스LCD를 회생시키기 위해 올해 초 구원투수로 나선 권 사장이 히든카드로 꺼내든 '맥스캐파'(Max Capa)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맥스캐파란 가동 중인 기존 공장 설비에서 낭비 요소를 제거해 생산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활동을 말한다. 즉, 신규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대신, 기존 설비의 효율을 극대화한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LG필립스LCD는 지난해 TV 및 컴퓨터(PC)용 LCD 패널의 판가 하락과 PDP 경쟁력 심화, 원화강세 등 '삼중고'로 시련의 나날을 보냈다. 급기야 수익성도 급락, 한해 동안 무려 8,790억원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LG그룹이 받은 충격은 컸다. 변화가 필요했다. 지휘봉을 넘겨받은 권 사장은 LCD 시장이 성장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감안, 양적인 경쟁보다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다. 권 사장의 이 같은 판단은 '극한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맥스캐파 체제를 탄생시켰다.
새 조직도 만들었다. 4월에는 4개 부서로 운영되는 맥스캐파 전담 부서를 임원급 조직으로 승격시켰다.
맥스캐파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기존 설비의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설비능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그 시작이요, 이렇게 높아진 생산능력 내에서 품질 불량 등 생산성 저해 요인을 '제로'화 시키는 것이 그 마무리다. 맥스캐파 활동은 즉시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파주공장 7세대 라인에선 작업순서를 바꾸고 로봇의 작업 속도를 높여 1분 넘게 소요됐던 작업시간을 50초까지 줄였고, 노트북용 패널의 백라이트 부품을 줄여 ㎡당 매출원가(2분기 기준)도 전분기 대비 12% 가량 절감했다. 전체 생산라인 가동률도 15% 포인트 가량 높아졌다.
맥스캐파 활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실적 역시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LG필립스LCD의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에 비해 43% 늘어난 3조9,530억원, 영업이익은 362%나 급증한 6,930억원을 기록했다. 부진의 늪에 빠져 허덕이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기적과 같은 성장세다.
맥스캐파는 사내용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생경영 차원에서 장비와 원재료를 공급하는 협력사들의 성과 극대화를 돕기 위해 전담부서를 따로 신설, 맥스캐파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
LG필립스LCD는 바닥을 딛고 일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권 사장을 포함한 임직원들은 다시 한번 신발끈을 조여 매고 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죠. 맥스캐파 등에 따른 진정한 성과는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LG필립스LCD의 극한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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