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가을은 단풍과 억새의 계절. 현란한 단풍과는 달리 억새의 수더분함에서는 시간에 순응하고 준비하는 차분함이 느껴진다. 억새를 그려내는 것은 색이 아니라 빛이다. 가을에 피어나는 하얀 솜털의 억새꽃은 대낮의 청명한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내고, 해질녘 번지는 노을은 진한 구릿빛으로 담아낸다.
억새를 감상하기 위해선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이 필수다. 억새란 것이 맨 바람을 맞는 높은 산 꼭대기 부근에서야 군락을 이뤄 숨막히는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 포천 명성산
수도권 최고의 억새 명소. 명성산 억새군락지로 가는 가장 편한 길은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오르는 길이다. 산을 에둘러 올라가는 길로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명성산 삼각봉 동편 분지 10만㎡은 온통 억새 뿐이다.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은 한길을 넘는 억새 속에 파묻혀 가을을 호흡한다. 억새밭 가운데에 궁예가 마셨다는 궁예약수터가 있고, 능선에는 한눈에 억새군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햇빛에 따라 시선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하는 억새꽃의 군무를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등룡폭포-비선폭포 코스는 3시간 30분,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자인사 코스는 4시간 가량 걸린다.
■ 밀양 사자평 고원
우리나라 억새 군락으로는 가장 넓다. 재약산(1,189m) 수미봉부터 사자봉 일대의 해발 800m 되는 고원지대의 460만㎡에 억새 장관이 펼쳐진다.
평평한 고원인 억새밭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표충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훈련시켰고, 여ㆍ순 반란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표충사에서 홍룡폭포, 고사리 마을을 지나면 정상을 향하는 억새밭이 시작된다. 억새밭 너머로 멀리 영남 알프스의 우람산 산세가 한층 볼거리를 더한다. 표충사에서 폭포로 이어지는 길가의 옥류동천 주변은 단풍 또한 곱다.
■ 창녕 화왕산
봄에 진달래로 붉은 융단을 뒤집어 썼던 화왕산(757m)은 가을이 오면 정상의 평원에 억새물결로 하얀 솜이불을 덮는다.
3시간 남짓한 화왕산 산행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창녕여중에서 시작한다. 40분쯤 오르면 도성암. 여기서 정상까지 50여분의 여정은 매우 힘겹다. 네발로 기어 오르다 고개가 끝나는 곳이 정상. 화왕산성이 에워싸고 있는 분지가 억새의 군락지다. 18만㎡ 가득 억새 바다가 펼쳐진다. 화왕산 억새밭을 한바퀴 도는 데는 한시간 남짓. 능선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모습의 억새를 볼 수 있다.
■ 정선 민둥산
정선군 남면의 민둥산(1,118m)은 이름처럼 나무가 없는 민머리 산이다. 산의 머리가 벗겨진 이유는 나물 때문. 나물 많은 정선에서도 특히 이곳에서 산나물이 많이 났기 때문에 매년 한번씩 불을 질렀다고 한다. 둥그스름한 산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약 66만㎡ 가량.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산 전체가 은빛 물결에 휩싸인다.
증산초등학교에서 민둥산 정상을 거쳐 지억산(1,157m) 능선을 타고 동면의 화암약수까지 이어진 등산로는 약 15km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세도 넉넉하고 길도 뚜렷해 서울에서 당일 산행지로 즐길 수 있는 코스다.
■ 제주 산굼부리
제주는 섬 전체가 억새의 바다다. 가장 큰 억새 군락지를 꼽는다면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산굼부리를 든다. 산굼부리는 ‘산에 있는 큰 구멍’이란 뜻. 국내 유일의 마르(Maar)형 분화구다.
화산이 폭발했는데 분출물이 없이 가스만 뿜어져 나온 특이한 분화구란 뜻이다. 헛가스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분화구 크기는 백록담보다 크다.
분화구 안의 식생이 식물의 보고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가을이면 분화구 보다 분화구 주위를 둘러싼 억새밭을 보러 오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억새의 바다 너머로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장관이다. 마라도가 바라보이는 송악산도 억새 감상하기에 좋다.
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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