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69) 계간 ‘창작과 비평’ 발행인.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 등 그가 지난 40년간 고안한 진보적 담론들은 정치한 글 뿐만 아니라 좌담, 토론, 인터뷰 등 ‘말’ 을 통해서도 논리를 완성해갔다. 특히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여러 지식인들이 격론을 펼치고 이를 통해 창조적 담론을 생산하는 ‘좌담’ 은 그의 장기였다.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동안 우리 사회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과 가졌던 대화를 모은 <백낙청 회화록(會話錄)> 을 출간했다. 그는 17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남의 말을 잘 듣는 능력이 수많은 대화를 창조적으로 지속 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듯하다”며 “염치없게도 제 이름으로 나왔지만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백낙청>
백 교수는 책 출간을 위해 올초부터 2,700페이지에 달하는 교정지를 검토하면서 ‘우리사회에 토론문화가 부재하다’ 는 비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이 한 시대를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특히 자신이 ‘70년대 세대’ 에 속해있었던 것은 두고두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정
치적으로 암혹기였지만 위로는 리영희, 박현채, 고은, 신경림으로부터 아래로는 김지하, 황석영까지 모두 살아있었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우리 담론계의 활력이 넘치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많은 분들이 뛰어났지만 특히 박현채 선생은 당신이 일구어낸 분야에 대한 공력이 대단했던 분이지요. 후배들이 조금이나마 불성실하거나 과장된 논리를 펼치면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곤 했어요.”
백 교수는 또한 원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민족’을 앞세운 낡은 논리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 알리바이를 발견하는 소득도 얻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억압적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정권이 용납했던 용어가 ‘민족’이었다”며 “예컨대 ‘민중주의적 민족주의’를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함께 읽어달라”고 요즘 독자들에게 주문했다.
젊은 세대의 토론능력 부재에 대해서도 “젊은 세대가 우리보다 지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근거가 있는 현실담론을 생산해내는 훈련과 공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계간 창비의 특징으로 늘 화제를 모았던 지식인들의 집단좌담이 요즘에는 부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영문학자, 출판인, 이론가로서 활동하던 그는 2005년부터는 6ㆍ15 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로 통일운동가로서의 활동영역을 옮겼지만 ‘지식인의 본령’을 입증하는 새로운 이론생산에 대한 정열은 여전했다.
백 교수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남들하고 이야기하고 싶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싫지않다”며 “앞으로는 활동가적인 회화를 줄이고 예전처럼 탐구자적인 회화를 좀더 많이 하고싶다”고 말을 맺었다.
■ '회화록'은 어떤 책
전 5권으로 선보인 <백낙청 회화록> 은 염무웅 임형택 최원식 등 문학ㆍ학술계 후배 인사들이 백낙청 계간 '창작과 비평' 발행인의 고희를 기념해 기획한 책이다. 백낙청>
1968년 1월 하버드대를 졸업한 젊은 스타비평가였던 그가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문학의 현실참여에 관해 펼친 논쟁부터 6ㆍ15평양축전에 참가한 뒤 지난 6월 인터넷통일언론기자단과 가진 간담회까지 책은 '말' 로 이뤄진 그의 논리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등장인물은 백철, 김동리, 리영희, 김지하,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드릭 제임슨, 가라타니 고진 등 국내외 지식인 133명을 망라한다.
구하기 어려운 문서자료나 일회성 방송자료 등도 발굴해 수록한 점도 의미가 있다. 1980년 창비 봄호에 게재하려다 당국에 의해 삭제됐던 좌담 '1980년대를 맞이하며' 를 발굴해 1권에 실었다.
책은 엄혹한 정치상황 아래서 문학의 현실참여, 민족문학, 분단체제론 등을 주장하던 70, 80년대의 진보적 이론가로서 과거 모습에서부터 '박정희에 대해 민주화진영에서 충분한 인정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 이라며 최근 민주화진영의 교조성을 비판하는 정직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사상적 편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간행위원인 백영서 연세대교수는 "백낙청 개인의 사상ㆍ실천에 관한 자전적 기록일 뿐 아니라 6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펼쳐진 주요한 담론을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라며 "현대 사상사 연구자들을 위한 충실한 자료로서의 쓰임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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