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출처 : <미당 시전집 1> , 민음사, 1994 미당>
◆약력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호 미당(未堂) ▦서울 중앙고보 졸업,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41년 첫 시집 <화사집> 출간, 김광균ㆍ김동인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9~79년 동국대 문리대학 교수 ▦2000년 12월 별세 ▦대한민국문학상, 5ㆍ16문학상 등 수상, 금관문화훈장 추서 ▦시집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등 질마재> 동천> 신라초> 시인부락> 화사집>
◆해설
서정주는 극단적인 숭배와 비난의 대상이 된 시인이다. 그를 ‘시의 정부(政府)’라고 명명하거나 ‘한국어에 내린 축복’이라는 말하는 것은 그 압도적인 위상을 대변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정치적 오류를 문학적 오류로 연결짓는 논리도 존재한다. 이 모든 찬사와 비판은 그가 한국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그의 시는 한국현대시가 한국어를 통해 도달한 토착적인 현대성의 한 표본이었다. 그는 1920년대 시의 과잉된 감상주의와 1930년대의 생경한 모더니즘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원초적인 감수성의 자리를 만들어내었다.
그 감수성이 최초로 드러난 곳은 <화사집> 이라는 청춘의 언어였다. 이 시집에서 그는 식민지 청춘의 정념과 혼돈과 광기를 강렬한 관능과 육체의 질주를 통해 보여주었다. 화사집>
하지만, ‘서정주의 시대’를 만든 것은, 그의 장인적인 재능도, 그의 불우한 당대도 아닌, 광활한 정신의 원시림을 탐사하려는 그의 문학적 방랑이었다.
해방 이후의 서정주의 시는 급격하게 현실에 대한 초연한 거리와 신화적 관념으로 나아간다. 서정주가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 다 나았습니다’라고 노래했을 때, 그의 시는 이미 다른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피의 잉잉거림이 잦아들면서 그는 현저히 영원의 형이상학 속으로 매진한다.
그 매진을 통해 그는 기념비적인 정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한 비평가가 “짙은 요절적 전조를 기적적으로 극복했다”고 말할 정도로 핏빛 질환에 시달리던 젊음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서정주는 동양적인 영원성의 세계에 귀의하면서, 또 하나의 완결된 미학의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동천’은 그의 후기 시 가운데 미학적인 정제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초기시의 뜨거움에 대비되는 이 시의 차가운 아름다움은, 그의 후기 시의 시적 성취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한 겨울의 차가운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는 맑고 정갈한 풍경. 그 초승달의 풍경을 시인은 자신의 ‘님의 눈썹’으로 의미화 한다.
그 의미화가 시적 주체의 동사(動詞)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시의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 시의 절정은 이 풍경화에 문득 놀라운 시간의 생기를 부여하는 ‘매서운 새’의 이미지이다. 그 새의 동선으로 인해 풍경화는 단지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적인 사건이 된다. 새는 그렇게 영원성을 향한 인간의 꿈을 날카롭게 가로 지른다.
이광호(문학평론가ㆍ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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