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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2> 첫 선등 드디어 머리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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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2> 첫 선등 드디어 머리를 올리다

입력
2007.10.1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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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등은 암벽등반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로프의 끝을 매고 수직의 세계를 오르는 것은 단독 등반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동료와 줄을 함께 묶고 있긴 하지만 오르는 도중 일어나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혼자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선등자에게는 추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전광석화처럼 빠른 판단력 및 집중력이 필요하다.

선등은 클라이머로 성숙하기 위한 성장통이요 한번쯤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며 자기시험의 기회이기도 하다. 흔히 선등에 대해 “머리를 올린다”고 말하는데, 머리를 올리는 것이 상투를 튼다는 의미 즉 어른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선등은 클라이머로 태어나기 위한 성인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선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생 선등 한번 못한 채 산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등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선등자는 그런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20대 후반이던 1960년대 내 첫 선등의 자일 파트너는 이경해다. 그는 당시 서울시립농대에 재학중인 조용하고 온화한 학생이었다. 내가 세 번째 맞이한 바위에서 선등을 자처했을 때 그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로프의 끝을 묶은 뒤 그를 향해 “경해야, 혹 내가 등반 도중 떨어지면 네가 내 목숨을 확실하게 챙겨(확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의 신중함을 저는 믿습니다”라고 응수했을 뿐이다. 선배가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으니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새내기 바위꾼인 나는 아무 사전정보 없이 인수봉 B코스(1937년 개척된 바윗길)를 오르기로 하고 자연스레 뻗어있는 등반선을 향해 출발했다.

지금 표현으로는 온 사이트(On Sight) 등반이다. 행운의 여신이 도왔다고나 할까. 이 루트의 크럭스 피치(Crux Pitchㆍ어려운 구간)인 항아리 크랙을 무사히 통과한 후 마지막 피치의 마등(당시는 접착력이 떨어지는 군용 워커를 신고 등반하던 때라 이곳을 말 등에 올라타는 듯한 자세로 올랐다)을 수월하게 지나 정상에 서니 사계가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며 온 세상이 내 발치 아래에 놓여 있었다.

서해를 향해 흐르는 한강의 도도함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오봉, 선인봉의 웅자가 한 눈에 펼쳐진다.

“등산은 스포츠이자 탈출이고 정열이기도 하며 일종의 종교와 같다”고 한 프랑스 산악인 장 프랑코의 말을 곱씹으며 가슴 가득한 열정과 충일한 기쁨을 안고 노을이 비낀 서북면의 긴 하강루트를 내려왔다.

능력보다 더 높고 어려운 곳을 오르려는 오만함이랄까 아니면 무지에서 오는 용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첫 선등에 성공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 반복된 등반이었으나 후배 앞에서 두려움을 감춘 채 여유를 보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젊은 날의 허장성세였다. 나는 첫 선등의 성공으로 간덩이가 부었으며 몇 년 후 이런 오만함이 나를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첫 선등에서 나를 따른 이경해는 농대 졸업 후 낙후한 농촌경제를 살리겠다며 전북 장수로 귀농했다. 산지의 자갈밭을 수만평의 농장으로 일궜고 후계자 육성에도 앞장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의 농부상’을 수상했다. 그가 피와 땀으로 일군 농장이 낙농 교육장으로 지정됐고 농촌 청년들이 문하로 모였다. 이경해가 그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했으니 사람들은 현대판 상록수라고 격찬했다.

1990년 그는 한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장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관했다. 그 자리에서 협상을 반대하며 등산용 칼로 할복했는데 그 칼이 내가 귀농 기념으로 선물한 스위스제 군용 나이프였다. 몇 년간 산행을 같이했지만 그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그때 나는 크게 놀랐다.

그는 설악산 적설기 등반에서도 남다른 체력으로 반팔셔츠 차림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겨워 하는 후배의 짐마저 지는 등 힘자랑은 했어도 조용한 선비 같았다.

그는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하기 위해 극한적인 의사 전달 수단으로 두 번째 자해를 선택했고 결국 이승을 등졌다.

알피니스트로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에베레스트 100일의 장정> 이란 책 속에 세월의 무게가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졌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 지금도 인수봉을 함께 오르던 옛일이 떠오른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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